존재의 증명

나 자체로 살아갈 수 있는

by 일삼사삼사공

우주는 정말 거대하다.


지구

태양계

우리 은하

은하군과 은하단

초은하단

은하 필라멘트


지구인들이 알아낸 지구 밖의 세상이다. 우주에서 밝혀진 가장 거대한 구조인 은하 필라멘트 밖에는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다.


이 거대한 우주에서 나는 어떤 존재일까? 나는 지구에서 나의 존재를 증명하며 살기에 급급하다. 나는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설명하고, '어떤 사람'에 들어갈 말을 하기 위해 또 내가 누구인지 설명한다. 평생을 나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살아야 한다. 나의 존재를 증명하지 않는 순간, 수많은 증명들 사이에서 잊혀지고 만다. 잊혀지는 순간은 쓸쓸하기 때문에 매 순간 버텨야 한다. 최선을 다해 증명해야 사회 속에서 나는 살아남을 수 있다.


지구라는 행성에서 나는 아주 작은 존재다. 태양계에서도, 우리 은하에서도, 은하군과 은하단에서도, 초은하단은 물론이고 은하 필라멘트에서는 먼지보다 더 작은 존재이다. 이런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내가 애써야 한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아직도 모른다.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매일 바뀌고, 잠에 드는 시간과 일어나는 시간도 매일 바뀐다. 내 존재를 잘 모르겠다. 나를 가장 잘 아는 건 나일텐데 왜 나는 아직도 나를 모를까? 내가 누구인지 고찰하기보다는 누구인지 증명하는 것에 익숙해져서 그런 것 같다.


내가 누구일까? 내 존재의 뿌리는 어디일까? 생명이 있다고 밝혀진 유일한 행성이 지구인 것이 가끔은 아득하게 느껴진다. 빅뱅이론도 창조론도, 혹은 온갖 음모론도... 전부 믿고 싶어질 때 나에게 존재의 이유를 자꾸만 불어넣던 사람이 생각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존재의 이유는 존재 증명의 기반이다. 이유가 있어야 증명할 수 있다. 내가 누구인지 설명하고 그 이유를 증명해야만 하는 이 지구는 가혹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매일 나의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 이곳에서 나는 그의 곁에 있으면 증명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나는 그의 옆에서는 증명하거나 증명되지 않았다. 내가 그 누구라도 상관 없었다. 내가 사실은 아주 못되고 이기적인 사람이어도, 어느 날은 그 이기심 때문에 울어도 나는 나였다. 내가 누구임을 증명하지 않아도 뒤쳐지지 않았다. 나는 나였다. 불완전한 모습은 이 지구에서처럼 단점이 되지 않았다. 세상에 증명하다가도 돌아가면 나 자체로 존재할 수 있었다. 나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지 않아도 되었다. 내가 누구인지 잊어도 되었다.


그런데 그는 나에게 더이상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자신이 없다고 했다. 자신이 누구인지 자꾸만 잊어가는 것 같다고 했다. 내 곁에서는 누구인지 잊어도 돼. 그는 미안하다는 말만 했다. 누구인지 잊은 채로 나를 마주할 자신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내가 증명하는 것 같다고 했다. 사실은 증명하지 않았는데... 나도 모르게 그에게 존재 증명을 요구한 것일까? 자책은 번져갔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의 곁에서 존재 증명을 할 필요성이 크게 느껴진다면 더이상 그 관계는 아름답지 않다는 것 말이다. 가혹한 이 지구에서 느끼는 감정을 그대로 느끼게 한다면 그 끝은 존재 증명만 하다 끝날 것이라는 것을. 내가 그의 옆에서 느낀 것들을 그가 느끼지 못했다면 나는 이미 그에게 존재 증명을 요구한 것이라는 것도. 그를 증명으로 몰아세우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의 곁에서 내가 누구인지 잊어도 되었는데 나는 오히려 그가 자신을 잊게 했다. 그에게는 자신이 누구인지 찾을 수 있는 사람이 더 어울릴 것이다. 함께 잊는 것이 아닌 함께 찾을 수 있는 사람.


증명해서 사랑했던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존재해서 사랑했음을 말하고 싶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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