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군인은 군인이다
여기로 이사오기 전까지만 해도 근육과 체력을 지키기 위해 나름 꾸준히 필라테스를 배웠다.
하지만 내가 지금 사는 곳은 군인마을.
자연으로 가득한 군부대와 군관사 근처에는 피엑스와 군장점 그리고 몇 개의 가게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필라테스도, 피아노 학원도 당연히 없다.
여러 가게들과 운동시설이 있는 번화가로 가려면 차로 최소 30분은 이동해야 했기에 지금 이 환경에서 가장 가까운 운동시설은..
피엑스 건물에 있는 헬스장이었다.
운동을 해야겠다! 헬스는 할 줄 모르지만 러닝머신이라도 해야겠다!
어떻게든 체력을 유지하고 근손실을 막아보려는 마음으로 헬스장에 등록했다.
군교회 여집사님들께 듣기로는 오전에 헬스장 가면 아이들 등원시키고 온 엄마들이 많아서 러닝머신에 자리가 없다고 했고, 퇴근 시간 후에 오면 군인들이 많아서 러닝머신은 텅 비어있다고 했는데 내가 헬스장 간 시간이 퇴근시간 이후여서 그런지 집사님들 말씀대로 5대 정도 되는 러닝머신은 텅 비어있었고, 밀리터리무늬의 로카티 입은 군인들은 다른 운동기구에서 운동을 하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대로 두세 번째에 있는 러닝머신에 올라가서 스타트 버튼을 눌렀다. 내가 한 발 한 발 걸을 때마다 오래된 나무바닥을 밟는듯한 삐걱삐걱 소리가 들려왔다.
'아 맞다, 맨 끝에 있는 러닝머신에서만 삐걱 소리가 안 난다고 하셨는데...'
집사님들이 해주셨던 말씀을 더듬으며 맨 끝에 있는 러닝머신으로 자리를 옮겼고 거기서는 다행히 소음 없이 걸을 수 있었다.
러닝머신에서 정면을 바라봤을 때 내 시선이 닿는 곳은 창문이었는데 주변에 나무가 많다 보니 꽃가루와 송진가루 때문에 특히 봄에는 창문을 열지 말라는 안내가 적혀있었다. 안 그래도 쾌적하기보다 밀폐된 공간에서 운동하는 느낌이 들더라니... 환기는 잘 시키고 있는 건가... 듣던 대로 청소도 잘 안 된 거 같은데...
문득 열심히 운동하고 있는 군인들을 보니.. 마음이 짠했다.
'여기 공기청정기는 없나? 환풍기는 없나? 군인들이 좀 더 좋은 환경에서 운동할 수 있으면 좋겠네'
6의 속도로 걷다가 9의 속도로 달리기를 반복했다.
'일주일 동안 숨이 찰만큼의 강도로 운동을 한 적이 있습니까?'
건강검진 문진표의 질문에 0회라고 체크해야 했던 굴욕적인 순간을 떠올리며 열심히 달렸다....
땀을 흘리며 운동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샌가 중년 남성 한 분도 러닝머신을 이용하러 오셨다.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느낌상 군인인 게 확실했다.
러닝머신에 올라오신 중년 남성 군인분은 좀 걷다가 워밍업을 끝내신 건지 9로 달리셨다. 그리고 숨을 다 고른 나도 9로 달렸다.
혼자 달릴 때는 한 2분 3분 달리고 다시 걷고 그랬는데 옆에 다른 사람도 같이 달리고 있어서 그런가 나도 더 오래 달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년 군인분은 과연 얼마나 달리실 건가 궁금증이 들기도 했고 맨날 남편이랑 달리기 하거나 체력 대결 붙으면 내가 졌는데 이분이랑도 혼자 대결(?)을 붙어보고 싶어서 나도 따라서 열심히 달렸다.
9로 달린 지 5분이 지났을까... 점점 오른쪽 폐가 아파왔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나... 초등학생 때 학년 전체 달리기 대회에서 1등을 밥 먹듯이 하던 사람이고, 이사 다닐 때마다 테니스부, 육상부에 캐스팅됐으며, 학창 시절 내내 운동회 때 계주 4번 주자였고, 넘어져도 이겼고, 오래 달리기, 100m 달리기 등 달리기에서는 1등을 놓쳐본 적이 없는 사람인데!! 공부는 내세울 것 없었지만 운동과 체력만큼은 늘 1등을 하는 사람이었는데..!!
폐가 점점 아파온다....
힘들다..... 현기증도 나는 것 같다.....
정말.. 이분은 언제까지 달리는 거야?....
게다가 나는 러닝머신 이용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힘들어지니까 문득 균형을 잃을까 봐 걱정이 되기도 했다.
'안 되겠다.. 군인 이기려다가 나 넘어지면 큰일이니까 나만의 기준으로 달리고 끝내자....'
그래서 3분 더 달려서 총 8분 정도 달리고 속도를 줄였다. 그때까지도 군인 분은 계속 9로 달리는 중이셨다.
이미 오늘 내가 러닝머신에서 걷고 달린 시간이 거의 1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이제 그만 걸어야겠다. 더 했다가는 땅에 내려갔을 때 현기증이 나겠다 싶어서 천천히 걸으며 몸을 적응시킨 후에 stop 버튼을 눌렀다.
조심조심 땅으로 내려와서 주변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땀을 닦고 물을 마셨다.
땅에 적응할 때까지 좀 쉬다가 일어나서 신발을 갈아 신으러 갔는데
와 군인은 중년이든 어떻든 군인이구나...
그 남성분은 아직도 9로 달리고 있었다. 이미 10분도 넘은 것 같은데 진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내가 오기 전부터 와있던, 다른 기구 이용하는 군인들 중에도 나간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1시간이나 지났는데 진짜 다들 대단하다... 군인들은 체력 관리도 정말 열심히 하는구나....
약한 저는 먼저 물러납니다... ㅜㅜ
감탄하며 집에 가는 길에 남편한테 전화해서 이야기했다.
"나 러닝머신에서 군인이랑 대결 붙었는데 졌어. 9로 5분 넘게 달렸는데 그분은 계속 달리시더라 나 나갈 때까지도.. 진짜 대박이야"
남편은 정말 별 거 아니라는 듯이 대답했다.
"군인들은 체력측정할 때 기준이 더 높아 9로 10분은 그냥 달리지"
뜨헉.....
9로 8분 달린 것도 이렇게 힘든데.... 체력측정할 때 그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더 오래 달린다니..
나도... 매일 운동 열심히 해서 체력을 더 길러서 그만큼 달려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체력 좋고 근육량 많던 때만큼 다시 건강해지고 싶다.
이렇게 폐가 아플 만큼 달린 것도 너무 오랜만이고, 이렇게 숨을 몰아쉴 만큼 달린 것도 너무 오랜만이라 정말 신선하고 새로웠다.
일단은 9로 8분을 쉽게 달리는... 체력을 길러봐야겠다.
지금은 그것도 아주 힘들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