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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sol Park Jun 04. 2020

일상의 클래식 (1)

Vladimir Horowitz, Traumerei


1.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Vladimir Horowitz, 1903~1989)는 우크라이나 출신의 러시아-미국계 음악가로 전 세계 거의 모든 피아니스트들로부터 무한한 찬사와 존경을 받았다.난해한 패시지를 가볍고 깔끔하게 통과하는 테크닉, 부서질듯 섬세한 피아니시모 그리고 천둥같은 포르티시모. 현대의 리스트라 불리기에 일말의 손색이 없는 그의 복잡하고 환상적인 연주는 마치 인간 감성의 가장 날카롭고 내밀한 부분까지 닿아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젊은 시절 호로비츠의 압도적인 힘과 기예를 보여주는 가장 좋은 예시는 1942년 녹음된 생상스 작곡-호로비츠/리스트 편곡의 죽음의 무도Danse Macabre Op.40 로서, 그의 전성기 연주 중에서도 단연 백미로 꼽힌다.하지만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테크니션이었던 그의 연주는 마침내 1986년 모스크바에서의 Träumerei(꿈) 로 귀결되는 듯이 보인다.그것은 반추이자 회한이며 회상이자 회고였다.

삶의 긴 여정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오던 해, 여든 셋의 그가 꾸었던 꿈은 아마도 저마다의 풍파를 묵묵히 겪어내는 세상 모든 가련한 의지들에 대한 긍정이자 공감이자 위로였을 것이다.



2.

트로이메라이Träumerei는 슈만의 피아노곡 어린이 정경Kinderszenen에 7번째로 수록되어 있는 소품으로, 단순한 멜로디와 목가적인 서정성으로 인해 오랫동안 사랑받아 왔다.1838년 슈만은 연인 클라라와 사랑에 빠져 현실에 대한 행복감과 미래에 대한 기대감을 음악 속에 담아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꿈꾸는 미래에 클라라를 초대하고자 어린이 정경을 작곡하기로 마음먹었다. 이 작품집은 처가의 반대에 부딪혀 아직 가정을 꾸릴 수는 없었지만, 언젠가는 독일풍의 검소하면서도 근면한 가정을 꾸린 뒤 아이들이 뛰어노는 행복한 가족을 이루고자 하는 젊은 작곡가의 꿈이자 의지였다.이 곡은 제 이차 세계대전이 종전되던 날 라디오에서 우연히 흘러나왔던 것으로 유명하다. 오랜 총성이 멎고 누구도 어찌할 바를 몰랐으나 우리의 직관은 무엇을 가장 먼저 해야 할지 또렷이 알았다. 그것은 바로 인간성의 선언, 다시 말해 꿈을 꾸는 일이었다.


3.

고단하고 지리한, 정치하게 관리되어 불행히도 견딜만한 고통들뿐인 도시의 생활양식을 그럭저럭 버텨내다 보면 어차피 인생이란 이토록 철저히 혼자인 것인가 싶다가도 꽤 가끔 따듯하고 부드러운 무언가가 저릿하게 그리워진다.

아름다움이란 눈물이 왈칵 별처럼 쏟아지는 순간들과 같다. 다시 말해 사랑하는 사람의 귓속에 떠먹일 언어를 하루 종일 닦았다가 정작 그녀의 얼굴을 보는 순간 어떤 말도 기억나지 않곤 했던 새하얀 당혹감이거나, 예컨대 아무리 추억해도 돌아갈 수 없는 유년기 여름밤의 서늘한 바람의 감촉이거나, 이를테면 젊었던 엄마의 넓고 따듯했던 등 같은 것들.

그 찰나의 꿈결들로 인해 우리는 비좁고 완고한 자아를 넘어 가끔 위대한 사랑의 기적에 이르기도 하는 모양이다.


Video:

Vladimir Horowitz, Traumerei (Moscow,1986)Schumann, Kinderszenen Op.15 No.7https://youtu.be/qq7ncjhSqt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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