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죽음의 트라이앵글'이라는 악명 높은 입시를 치른 08학번이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당시에는 수능 최저등급도 필요 없이 대학에 합격할 수 있는 '수시 2-1' 전형이 있었다. 수시에 합격하면 정시에 응시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수능 최저등급도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수시 2-1' 합격은 곧 입시레이스의 종료를 의미했다.
이런 코스로 일찍부터 합격을 통보받은 행운아들은 10월부터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감사하게도 나도 그중 하나였다.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기숙사 학교였다. 기숙사 방에서 노트북으로 합격 소식을 확인하자마자 복도를 울리는 축하를 한 몸에 받았다. 그리고 다음날, 짐을 싸서 바로 고향으로 돌아왔다.
부모님은 나에게 합격 축하금으로 100만 원을 주셨다. 그리고 앞으로 학비와 하숙비 외에는 경제적 지원을 하지 않겠다고 하셨다. 얼떨결에 고등학교 3학년 나이에 반(半) 경제적 독립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 기본적으로 들어가는 비용이 엄청나다는 것을 그제야 처음 알게 되었다.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은 물론이고 병원비, 통신비, 교통비, 책값 등 내 한 몸 건사하는 것인데도 쓸 곳은 넘쳐났다.
엄마는 용돈을 받지 않고 살아가는 내가 자립할 수 있도록 첫 일자리를 주선해 주셨다. 명문대 합격 타이틀을 이용해 과외학생들을 몇 명 연결해 주셨는데, 그 녀석도 그중 한 명이었다.
녀석은 여러모로 특별했다. 우선 이름부터가 특이했는데, 두 글자로 된 성을 가진 아이였다. 나는 처음에 이름이 외자이고 성이 두 글자인지 모르고, 성의 끝 글자와 외자인 이름을 붙여서 이름처럼 불렀다. 아이는 이런 상황이 익숙한지 나의 틀려먹은 호칭을 바루지도 않았다. 나중에서야 아이를 먼저 알고 있던 엄마와 이야기하다가, 녀석의 이름 세 글자 중 앞의 두 글자가 성이고, 나머지 한 글자가 이름인 것을 깨달았다. 그때까지 묵묵히 틀린 호칭을 듣고도 나를 선생으로 따를 만큼 녀석은 무던했다.
녀석이 나를 만난 것은 초등학교 6학년에서 중학교 1학년으로 넘어가는 겨울방학 때였다. 덥수룩한 머리, 잘 씻지 않아 냄새나는 발, 커다란 덩치. 얼핏 보면 호감이 가지 않는 외모였지만, 자세히 보면 뿔테 안경 뒤에 뽀얗고 귀여운 얼굴이 숨겨진 순수한 녀석이었다.
녀석은 학교 수업시간에 무엇을 했는지 그 나이가 되도록 알파벳도 모르고 있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6년 동안 학교에서 영어를 배웠는데도 까막눈인 녀석을 보니 내가 눈앞이 캄캄했다. 세 달 후면 중학교 입학이다. 그런데도 녀석은 태평했다. 오히려 걱정되어 조바심이 난 쪽은 나였다.
녀석은 내 첫 제자였고, 나는 입시레이스를 통과하며 온몸이 열정으로 불타올랐던 예비 대학생이었다. 녀석을 이대로 중학교에 진학시키는 것은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나는 녀석 한 명만을 위해 커리큘럼을 짜고 교재를 찾아다녔다. 무엇보다 기본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기반이 탄탄해야 그 위에 무엇을 쌓아 올려도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녀석은 다행히 내 뜻을 따라주었다. 알록달록한 유아용 파닉스 책이 우리의 첫 교재였다.
그때부터 녀석과 나의 춥지만 뜨거운 사투가 시작되었다. 나는 일부러 숙제를 많이 내주었다. 많이 뒤처지기도 했지만, 기초공사 단계라 어려운 내용이 거의 없기도 했다. 무조건 반복이었다. 일단 영어를 읽을 줄 알아야 뭐라도 되겠다 싶었다.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았다. 이 겨울, 중학교 1학년 내용을 선행학습 할 수는 없어도 초등학교 6년 과정을 엇비슷하게라도 따라잡겠다는 일념 하나로 우리는 뜨겁게 타올랐다.
함께 독파한 교재가 쌓이고, 추위가 깊이를 더해가던 어느 날, 녀석이 나를 보자마자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예의 그 느릿하고도 귀여운, 억양이 특이하면서도 어딘가 정감이 가는 말투로 말이다.
"선생님"
"응"
"제가요, 엄청난 것을 발견했어요."
"뭔데?"
"제가 맨날 타고 다니는 자전거에요,"
여전히 상기된 표정으로 뜸을 들이는 녀석. 얼굴이 환해지더니 자랑스러운 발견을 알린다.
"레스포(Lespo)라고 쓰여있는 거였어요!"
질량과 부피의 상관관계를 깨닫고 벌거벗은 몸으로 '유레카'를 외치며 뛰쳐나온 아르키메데스나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도 이와 같이 기뻤으리라. 나도 그 말이 참 기쁘고 반가웠다. 됐다. 됐구나. 내가 영어를 막 읽기 시작했던 시절의 추억도 생각이 났다. 가족들과 함께 외식을 하러 나가는 길에도 영어로 된 것이면 무엇이든 읽어대며 우쭐하고 뿌듯해하던 시절이었다.
녀석은 그때부터 심봉사 눈 뜬 것처럼 닥치는 대로 읽어내기 시작했다. 물건, 옷, 간판, 광고 등 영어로 된 것들이면 무조건 읽어보고는 알고 있던 지식과 맞춰보며 배움의 즐거움을 알아가기 시작했다. 일상생활에 영어가 이렇게나 많았냐며 놀라는 녀석.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고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녀석을 보니 설리번 선생님이 된 기분이었다. 그 해 겨울, 여름보다 더 뜨거웠던 나의 헬렌켈러와의 추억이, 오늘따라 참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