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순간부터 나는 아파트에 살았다. 군포시 산본동 주공아파트 1단지. 수원시 지동에 있는 빌라에 살다가 3살 때 군포신도시로 이사를 가면서 나는 아파트 생활을 시작했다. 한 층에 16호 정도가 함께 사는 복도식 아파트였고, 우리 집은 11층 15호였던 것 같다.
ㄱ자로 꺾인 건물 구조에 같은 햇볕을 공유하며 나란히 살고 있는 12,13,14,16호 오빠들과 나는 늘 즐겁게 어울렸다. 탁구선수를 하는 16호 택수오빠, 얌전하고 레고를 좋아하는 14호 희태오빠, 조금 새침했던 13호 창수오빠, 오이처럼 뾰족한 12호 창상이 오빠, 호박처럼 둥그렇고 따뜻했던 12호의 둘째 창민이 오빠.
오빠들과 어울릴 때 나는 고작 예닐곱 살에 불과했다. 오빠들은 전부 초등학생 혹은 그 이상이었다. 택수오빠는 고등학생인 데다가 훈련을 한다고 아침 일찍 나가서 밤늦게 들어와서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다. 희태오빠는 나와 동갑내기 창민이 오빠를 불러다가 레고놀이와 로봇놀이를 자주 했다. 창상이 오빠는 아이들을 불러 모아 축구를 하러 나갔는데 나한테는 꼭 골키퍼를 시켰다. 창수오빠가 신고 다니는 축구화 소리가 복도에 또각또각 울릴 때마다 얼마나 축구화를 갖고 싶었는지 모른다.
네이버 부동산에 검색해 보니 아직 내가 살던 집이 그대로 남아있다.
ㄱ자로 꺾인 아파트의 양 날개가 만나는 곳에는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그 앞 공간이 넓었다. 11층에 사는 아이들은 그곳에서 팽이치기를 했다. 오빠들의 찍기 기술은 그 당시 내 눈에는 신의 경지였다. 500원짜리 까만색 고무팽이는 크고 무거웠는데, 어린 내 눈에도 좋은 팽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 건 300원짜리 연두색 플라스틱 팽이였다.
나는 형광핑크와 형광노랑이 섞인 줄을 꼼꼼하게 감아 휘리릭 팽이를 돌렸다. 장비빨 없이 정직하게 승부하는 스타일이랄까. 사실 오빠들은 나에게 팽이를 돌릴 순번은 부여해 주었지만, '양심상' 혹은 '매너상' 내 팽이에 찍기 기술을 쓰지는 않았다. 옆 팽이들에 부딪치거나 제 풀에 꺾여 쓰러질 때까지 오빠들은 말없이 내 팽이를 지켜주었다.
오빠들은 깍두기를 데리고 비비탄 총알 줍기에 나서기도 했다. 오빠들은 아파트 여기저기를 다니며 풀숲을 헤쳐 총알을 수거했다. 요즘 말하는 플로깅이냐고? 아니다. 아마도 총알을 다시 사려니 용돈이 모자랐나 보다. 오빠들은 길가에 버려진 총알을 주워다가 통에 모아 다시 총쏘기 놀이를 하곤 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집에도 장난감 총이 있었다. 오빠들의 영향이었나 보다. 나는 총알 줍기 노동에는 불려 갔지만 비비탄 총알을 넣어 총 쏘는 놀이에 참여한 기억은 없다. 고작 열 살 남짓밖에 안 된 꼬맹이들이지만 깍두기를 위험한 놀이에 끼어줄 수는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요즘은 복도식 아파트가 거의 사라졌다. '우리 라인'이 예전에는 가로로 길었는데, 요즘은 자꾸만 세로로만 높이높이 길어진다. '친구야~ 노올자~' 하면 누구라도 불러낼 수 있는 이웃이 있던 풍경이 이제는 없다. 코로나가 휩쓸고 간 뒤로 같은 층에 살면서 음식이라도 나누는 문화는 더욱 보지 못하게 된 것 같다.
나는 코로나가 창궐하기 시작할 때 임신을 하고, 거리 두기가 한창이던 때 아이를 낳았다. 아이의 백일 떡을 맞추면서 옆집에도 조금 드리면서 인사드리고 싶었는데, '실례가 될까 봐' 그렇게 하지 못했다. 괜히 쓸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월이 훌쩍 지나 돌이 지난 아이와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같은 층에 내리는 것을 보고 옆집 아저씨께서 말씀하셨다.
"새로 이사 오셨나 봐요?"
나도 다른 아파트로 이사를 오고, 벌써 옆 집이 한 번 바뀌었다. 지난번 이웃은 먼저 인사를 해도 받지 않는 바람에 마주칠 때마다 어찌나 민망하던지 나중에는 기분이 나쁘기까지 했다.
'키 크고 BMW 타면 다냐!'
기분이 나쁠 때면 나에게 없는 것들만 주워다가 괜한 자격지심을 느끼기도 했다. 새로 온 이웃은 서글서글한 인상에 엘리베이터를 타고 27층까지 올라가는 동안 간단한 대화를 할 수 있는 성격이다. 물어보니 부부가 모두 교대근무를 한다고 한다. 어쩐지 마주치기가 힘들더라. 그래도 만나면 반가운 이웃이 생긴 것은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맛있는 음식이 많이 생기면 당연하게 옆집과 나누고, 돌아오는 그릇에도 고마움이 담겨있는 이웃 사이는 이제는 어려운 걸까. 그렇게 지내려면 우선 내가 먼저 손을 내밀어야겠지? 부담스럽지는 않을까. 귀찮지는 않을까. 싫은데 거절도 못할 수도 있겠다. 온갖 상념에 오늘도 발을 떼지 못했다.
덩그러니 아파트 생활에 익숙해질 때도 되었건만, 아직은 아닌가 보다. 오늘따라 왁자지껄한 주공 1단지 11층의 깍두기 시절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