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 발령이 나서 다른 조직에서 일하게 되면서 나를 가장 옥죄어 온 말은 '옷차림'에 대한 당부였다. 내 위의 상관이 되실 분은 특정 인물을 거론하시며 '그분'처럼 입어주기를 원하셨다.
솔직히 부담이었다. 내 기준에 '그분'은 우리 회사 최고의 패셔니스타였다. 단아한 외모, 단정한 머리, 꾸민 듯 안 꾸민 듯 세련되고 기품 있는 옷차림. 자율복장인 회사의 장점대로 맨투맨 티에 운동화를 신고 다니던 나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뱁새가 황새를 한 번 따라가 봐야지. 며칠을 고민한 끝에 근로자의 날인 어제 옷을 사러 마트에 들렀다. 백화점에 들르기에는 형편이 안되고, 내 기억에 괜찮은 옷을 좋은 가격에 팔고 있었던 열린 창고형 매장 이마트 트레이더스에 갔다.
참 이상하지. 다른 것을 사려고 갔을 때는 눈에 잘 만 보이던 쓸만한 옷들이 어제는 없었다. 아무래도 의류 판매 노선을 바꾼 모양이었다.
예전에는 3만 원대 이하로 살 수 있는 깔끔하고 질 좋은 옷들을 들여놨었다면, 이제는 '명품'을 백화점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구매하는 곳이되어있었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트레이더스에서 구매한 몽클레르 패딩에 가품 논란이 있어 전량 회수조치 했다는 기사를 본 것이 기억이 났다.(트레이더스 몽클레르 패딩 가품 논란)
여긴 안 되겠다. 분수를 깨닫고 나도 노선을 변경했다. 질 좋은 옷을 싸게 파는 F2F가 있는 홈플러스로 가자!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홈플러스 자체 의류 브랜드 F2F. 남편과 나는 몇 년 전 이 브랜드의 미친 가성비를 깨닫고 시즌별로 옷을 구매하러 들르곤 했다.
마성의 브랜드 F2F는 남녀노소의 각종 TPO를 커버하는 다양한 옷을 생산하는 데다 대부분의 옷이 1-2만 원대로 가격도 저렴하다. 이월상품 세일까지 들어가면 5,900원~9,900원으로도 멀쩡한 새 옷을 구매할 수 있다.
그럼 질이 떨어지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몇 번이고 세탁기를 돌리고 건조기를 돌려도 어제 산 옷처럼 멀쩡하다.그러니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목덜미에 달린 택에 아무도 모르는 브랜드명이 쓰여 있다는 것만 감수하면 최고의 옷가게인 셈이다.
F2F에 도착한 우리는 그간 해온 대로 자연스레 이월상품 코너를 뒤졌다. 상사로부터 주문받은 옷차림을 구현하려고 보니 안타깝게도 가격이 아쉬웠다. 이월상품인데도 1-2만 원 정도의 가격이라 썩 맘에 드는 것은 아니었지만 일단 구매를 했다.
썩 마음에 들지 않는 옷을 계산하고 주차장으로 가려는데 평소에는 가방을 팔고 있던 공간에 옷이 잔뜩 걸려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더욱 놀라운 것은 바로 가격이었다.
의류 균일가 4,000원
가격을 본 나는 홀린 듯 다가가미친 듯이 옷을 골랐다. 회사에 입고 갈만한 옷이 수두룩했다. 브랜드는 다양했고, 사이즈는 대체로 55-66 정도였다. 딱 내 사이즈다.걸려있는 옷들을 눈으로 훑으며 마음에 드는 옷을 골라나갔다. 옷걸이를 들고 있는 손이 점점 무거워졌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한참을 고르다 보니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걸려있는 옷들에는 대부분 택이 없었다! 그제야 이 옷들이 구제 상품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잠깐의 머뭇거림이 있었지만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다. 아무렴 어때. 누가 옷을 주면 취향과 달라도 감사하게 받아서 일단 입어보는 사람이 나였다. 그러니마음에 드는 옷을 당근마켓에서 구매한다고 치면 마트에서 구제옷을 구매하는 것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저렴하게 옷도 사고 기부까지 하다니 1석2조다!
게다가 균일가 4,000원이라니. 언뜻 봐도 꽤 비싼 브랜드들도 눈에 띄었는데, 이 가격이면 안 살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옷의 퀄리티와 브랜드를 보며 나도 앞으로는 당근마켓에 옷을 내놓을 때 좀 더 저렴하게 가격책정을 해야겠다는 반성마저 들었다.
바지는 안 맞으면 곤란하니 탈의실에서 입어보고, 상의는 골라놓은 옷이 워낙 많아 거울 앞에서 몸에 대보며 남편에게 어떤지 물었다. 빠르고 정확한 그의 판단 덕분에 금방구매할 옷15개를 가려냈다.
6만 원입니다.
세상에, 옷 15개에 6만 원이라니! 고물가 시대에 이런 횡재가 있나! 게다가 카드결제도 되고 포인트 적립까지 된다고? 어머 이건 사야 해!
망설임 없이 결제를 했다. 이런 일이 다 있구나. 옷차림 때문에 괴로워하던 나에게 하나님께서 극적으로 길을 열어주신 것 같아 감사한 마음마저 들었다.
예쁜 포장은 필요없다. 어차피 내일부터 입을거니까!
나는 그 길로홈플러스 고객센터로 가서 F2F에서 산 옷을 모두 환불했다. 3개에 52,700원. 이것도 참 저렴한 가격이지만 15개에 6만원은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환불을 감행하는 나를 보며 남편이 말했다.
F2F가 밀리다니!
오늘 첫 출근을 하며 균일가 4,000원에 구매한 셔츠를 입었다. 몇몇 사람이 산뜻한 옷차림을 보며 칭찬을 했다. 이게 4,000원이라는 것은아무도 모를 것이다. 좋았어, 성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