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특별한 날이었다. 서른다섯이 된 지 열흘이 지난 기념으로 얻은 깨달음이었을까. 도보로 10분 남짓 걸리는 출근길에 갑자기 ‘삶에 아무리 힘든 순간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들 또한 영원하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나는 그간 죽지 못해 살아왔다. 이렇게 살 것이라면 왜 살아야하는지 몰라서 정말 괴로웠던 나날들이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만은 도저히 할 수가 없어서, 나에게 주어진 삶의 시간들이 빨리 흘러가버렸으면, 그래서 얼른 영원한 안식에 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죽을 생각을 안했던 것도 아니다. 삶이 괴로울 때면 그게 몇 층이든 간에 '여기서 떨어지면 어떻게 될까‘ 생각해보곤 했다. 고층 아파트로 이사를 가게 되면서는 창문 너머로 바닥을 내려다보며, 여긴 정말 한 방에 끝이겠네,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자 다른 방도까지 고려하기에 이르렀는데, 역시나 수면제를 조금씩 모아서 한꺼번에 입에 털어 넣고 잠드는 것이 가장 수월한 방법이라는 데에까지 생각이 미쳤었다.
정말 미쳤었다. 왜 그렇게 삶이 고단하고 힘에 부쳤는지. 그 때 나는 이미 망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 확신했었다. 과거의 나는 잘못된 선택을 했고, 돌이킬 방법은 없었다. 지금 나를 괴롭게 하는 모든 문제들과 나는 평생 함께하게 될 것이며, 삶이 복잡해지고 세월이 쌓일수록 문제들은 더욱 많고 다양해질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게다가 나는 이 모든 불행의 씨앗이 나에게 있다고 여겼었다. 직장 상사와 남편이 나를 이해되지 않는 이유들로 비난할 때마다 나는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생각이 강해졌다. 직장에서는 발령이라도 받아서 상사와 격리가 되었는데, 남편과는 매일 얼굴을 보며 살아야하니 비난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다. 무언가 일이 잘못되면 모두 내 탓이라고 하는 바람에, 내가 이 집에서 없어져야 도움이 된다는 깨달음이 찾아왔다. 나만 없으면 일을 그르칠 이유도 없었다. 아이는 부모의 등을 보고 자란다는데, 나 같은 사람을 보고 자라는 아이의 미래까지 심각하게 걱정이 되었다. 그렇다. 내가 말끔히 없어지는 것은 엄마로서 마지막으로 전달할 수 있는 깊은 모성애의 표현이었다.
어제는 그러니까 정말 특별한 날이었다. 죽지 못해 살았던 내가 인생은 롤러코스터라는 말에 조금씩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나는 막 긴 터널을 지나온 참이었다. 죽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하루 종일 지배하던 어느 날, 나는 용기를 내어 상담을 예약했고 나의 이야기를 들은 선생님은 부부상담이 필요하다고 강하게 권유하셨다. 집에서 제일 쓸모없는 존재의 청을 과연 들어줄까 싶어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사람 하나 죽게 두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을 했는지 남편은 나와 함께 부부상담에 참여해주었다.
거의 일 년 동안 이어진 상담을 통해 우리는 많이 회복되었다. 참 신기했다. 내가 판 무덤에 드러누워 눈 감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줄 알았는데, 관계가 회복되자 과거의 선택이 다르게 해석되기 시작했다. 희미하게 사라져가던 ‘그를 선택한 그때의 이유’들이 다시 기억나기 시작했고, 당시의 결정이 이해가 되면서도 아쉬웠다가, ‘그’의 장점들을 마주할 때면 장하기도 했다.
어두운 새벽을 온전하게 받아들이고 맞이한 아침의 평범한 빛은 그토록 경이로웠다.
이미 결말을 아는 사람처럼 지금 이 순간을 받아들이는 것. 그게 바로 희망을 사용하는 방법이다.
작가 김연수의 말이다. 나는 오랫동안 이 문장에 머물렀다. 원래 이런 문장은 나에게 들어올 문장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이제 알게 된 것이다. 터널은 반드시 끝이 나고 롤러코스터는 다시 올라가게 되어있다. 그리고 그 사실은 지난한 세월을 견디는 희망이 되어준다.
요즘의 나는 생전 해보지 못했던 생각을 한다. 하루의, 한 달의, 일 년의, 사계절의 리듬이 나를 기다린다. 봄의 꽃, 여름의 물놀이, 가을의 단풍, 겨울의 썰매가 기대된다. 나는 이제 삶을 즐길 것이다. 이제는 내 편이 된 남편과 함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