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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크림이 증발한다

못 본 사이에 많이 홀쭉해졌네

by 딘도

이상하다. 핸드크림이 자꾸 증발한다. 회사에서 내 자리에 얌전히 놓아두었을 뿐인데 못 본 사이에 통통하던 배가 홀쭉해졌다.


범인은 짐작이 간다. 옆 자리 B 부장님이다. 내가 복직을 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부장님이 핸드크림을 찾으셨다. 마침 내가 핸드크림을 몇 통이나 가지고 있어서 흔쾌히 빌려드렸다. 그 뒤로도 부장님께서 핸드크림을 자주 찾으시기에 아예 한 통을 드리겠다고 했다.


"에이, 괜찮아. 여기 놔두고 내가 필요할 때마다 쓸게."


부장님께서는 극구 사양하셨다. 그때 나는 부장님께서 빌려 쓰시던 제품보다 좀 더 작고, 몇 번 쓴 적이 있는 제품을 드리겠다고 했었다. 그래서인가. 부장님은 끝내 핸드크림을 받지 않으셨다. 새 제품을 드렸어야 한다는 후회를 얼마간 했지만 음에 묻고 넘어갔다.




그리고 꽤 세월이 흘렀다. 덥고 습한 여름이 지나 가을이 깊어가니 손이 건조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나와 오랜만에 핸드크림을 만졌다. 엇. 낯설다 이 그립감. 못 본 사이에 핸드크림이 증발해 버린 것이다.


하긴. 부장님은 '범인'이 아니다. 분명 쓰겠다고 말씀하셨고, 나는 흔쾌히 동의했다. 랜만에 만진 핸드크림에서 낯선 감촉을 느끼고 내가 제사 그때 일을 떠올렸을 뿐이다.


생리대 마찬가지였다. 편의점에서 1+1 하는 것을 잔뜩 사다가 화장실에 두고는 필요하면 써도 된다고 말을 전했다. 그 말이 리 퍼져나간 것인지 그 많던 리대가 금방 사라 것을 보고 척 당황했었다.




문득 회사 건물 2층 화장실에서 마주한 따뜻한 마음이 생각났다. 평소에는 갈 일이 거의 없는 2층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나오는데, 세면대 한편에 예쁜 핸드크림과 함께 '마음껏 쓰세요'라는 쪽지가 붙어 있었다. L 팀장님의 글씨체였다.


순간 내 좁은 마음이 부끄러워졌다. 가진 것을 기쁘게 내어주지 못한 내가 너무 멋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회사 책상 위에는 다 만 핸드크림이 서너 통은 된다. 꼼꼼히 챙겨 바르겠다고 다짐하고도 신경을 못 쓴 탓에 손은 아직도 거칠다. 다행히 핸드크림에 먼지가 뽀얗게 쌓이지는 않았다. 누군가의 손에 잡혀 제 할 일을 자주 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된 것 아닌가. 쓰임에 알맞게 증발한 것은 가장 아름다운 결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마음껏 쓰세요'라는 쪽지를 붙일까 하다가 단골 고객의 성향을 생각해서 관두었다. 그래야 진짜 마음껏 쓰실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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