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께서는 대학 합격과 동시에 축하금으로 100만 원을 주시고는 학비와 하숙비 외에는 돈을 주지 않으셨다. 생활비를 벌어서 살아야 하는 가난한 대학생은 서러울 때가 많았다. 엄마는 학비는 대학 때까지만 내주겠다고 하셨고, 나의 꿈인 '국문과 교수'가 되기 위해서 나는 대학원에 진학해야만 했다. 나는 대학에 다니면서 학비를 모아놔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무작정 아끼기 시작했다. 당시 나에게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무엇을 소비할 때 나의 절대 기준은 가격이었다. 식사나 음료를 구매할 때도 개인적인 취향보다는 늘 가격이 앞섰다. 한 끼를 가장 저렴하게 먹는 방법, 목마름을 가장 저렴하게 해결하는 방법, 돈 많이 안 들이고 이동하는 법 등 나름의 생존 스킬이 늘어갔다. 당시에는 건강과 시간도 돈인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몸으로 해결할 수 있는 부분들은 당연히 그렇게 했다. 택배로 짐을 부치고 홀가분하게 이동해도 되는 것을 캐리어에 잔뜩 짐을 넣어 들고 움직인다던가, 걸어서 30분 이내에 있는 곳이면 도보로 이동하여 최대한 교통비를 아끼는 식이었다.
한창 꾸미고 싶을 나이에 하도 아끼며 살다 보니 나를 치장하는 것에 돈을 쓰는 법도 잘 몰랐다. 머리를 하고, 화장을 하고, 옷을 사 입고, 새 구두와 운동화를 구매하는 것도 너무 비싸지 않게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세탁비도 아까워서 최대한 집에서 빨래를 해결했다. 옷을 드라이 맡기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그 당시의 나는 젊음으로 빛났지만 아끼고 아껴 생활하느라 초라했다. 한껏 꾸며보는 날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 사시사철 같은 운동화에 바자회에서 산 삼천 원짜리 백팩을 메고 등하교하는 세련되지 못한 학생이었다.
나는 먹고 싶은 간식이 생기면 일단 무조건 참았다. 참다 보면 더 이상 생각이 나지 않거나, 다른 저렴한 간식으로 욕구를 해소하면 고비를 넘길 수가 있었다. 한 학기 동안 살았던 연대 동문 근처에는 타르트가 맛있기로 유명한 집이 있었다. 타르트는 작아서 식사 대용이 될 수도 없으면서 주제에 가격은 너무 비쌌다.
내가 노래패 회장이던 대학교 2학년 때, 한 회사의 임원분들이 아카펠라로 연말 공연을 준비하도록 도와드린 일이 있었다. 연습이 끝나면 동아리원들과 나누어 먹으라며 타르트를 잔뜩 사주셨었다. 동문 타르트는 형형색색으로 영롱했고 정말 맛있었다. 그때부터 내가 생각하는 부자의 기준은 '타르트를 먹고 싶을 때 고민하지 않고 바로 사 먹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렇게 아낀 돈을 나는 희한한 방법으로 모았다. 어디서도 가르쳐 주지 않은 나만의 방식이었다. 당시에는 과외를 여러 개 하고 있었으므로, 돈이 들어오는 날이 다 제각각이었다. 체크카드를 사용하면서 잔액을 늘 확인했는데, 내가 워낙 아껴 살다 보니 잔고는 늘 떨어지다가도 올라가는 우상향 곡선이었다.
그러다 가끔씩 잔고가 백만 원을 넘어가는 순간이 있는데, 그때가 타이밍이었다. 나는 백만 원을 바로 다른 통장으로 옮겨버렸다. 백만 원을 빼고 얼마가 남는지는 고려할 사항이 아니었다.
어떨 때는 다음 과외비가 들어올 때까지 2만 원으로 버텨야 하는 상황이 오기도 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일명 2만 원으로 살아남기. 나 스스로에게 챌린지를 부여한 셈이다. 그렇게 모은 돈은 느리지만 차곡차곡 쌓였다. 대학을 졸업할 때, 나의 통장에는 700만 원이 찍혀 있었다
결국 고민 끝에 대학원은 진학하지 않았다. 대신 텀을 두지 않고 바로 돈을 벌 수 있는 회사에 인턴으로 취직했다. 얼마 되지도 않는 월급의 50%를 저축하고, 편도로 2시간 가까이 걸리는 출퇴근 길을 지하철을 타고 부지런히 오갔다.
몇 개월 뒤에 정직원이 되었는데, 여전히 월급은 쥐꼬리였다. 회사 가까이에 원룸을 구할 수도 있었지만, 버는 족족 월세와 관리비로 나갈 생각을 하면 아까워서 그럴 수가 없었다.
그때는 시간이 돈이라는 것을 몰랐다. 요즘에는 '레버리지'를 떠올리며 돈 주고 시간을 살 생각을 하지만, 당시에는 시간을 버리더라도 돈을 모으는 것이 당연했다.
습관처럼 절약하는 생활을 하다 보니, 어느새 700만 원은 4,000만 원으로 불어나 있었다. 주식이나 부동산은 하나도 몰랐다. 단순히 저축으로만 모은 돈이었으니, 참 독하고도 순진했다.
당시 남자친구였던 지금의 남편은 부동산에 관심이 많았다. 내가 열심히 모은 종잣돈 이야기를 듣더니, 친정 근처인 동탄에 청약을 넣어볼 것을 권했다. 마침 청약통장은 있었다. 아빠가 내 이름으로 몇 년간 부어주시다가 넘겨주신 통장이었다.
넣는 족족 번번이 낙첨이었는데 어느 날은 덜컥, 당첨이 되었다. 워낙 낙첨 릴레이다 보니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넣은 곳이었다. 당첨이 되고 나서야 모델하우스를 가보았다. 평면은 잘 나왔지만 위치가 아쉬웠다. 그렇다고 그냥 날려버리기엔 아빠의 사랑이 담긴 통장이 아까웠다.
수많은 고민 끝에 장대비를 뚫고 모델하우스에 갔다. 남자친구는 멀리 있으니 대신 아빠와 함께였다. 계약서를 작성하고, 긴 세월 동안 힘들게 모았던 4,000만 원을 계약금으로 넣었다. 비록 계약금이지만 빚 없이 낼 수 있어서 뿌듯했다. 2016년 여름, 내 나이 만 스물일곱의 일이었다.
몇 년 전 결혼기념일에 남편이 손에 상자를 하나 사들고 집에 들어왔다. 자세히 보니 타르트다. 한 조각만으로도 기쁜데, 한 판이라니! 언젠가 내가 말한 나만의 '부자의 기준'을 기억하고 준비한 선물이었다.
그날 나는 한 자리에서 타르트를 몇 조각씩 먹어치우는 '타르트 플렉스'를 했다. 행복했다. 다른 것보다도 내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고 기억해 주었다는 사실이 감동이었다. 별 것 아닌 타르트 한 판이지만 나에게는 그 어떤 것보다 소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