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편지 06
마을 축제를 경험했다니 좋았겠다. 우리가 페루에 갔을 때가 생각난다. 새해라 가는 곳마다 축제였잖아. 할머니들로부터 우리네 막걸리 같은 치차를 얻어먹고, 가는 곳마다 환대받았었는데. 벌써 그리운 시간이 되었구나.
“아빠랑 걷는 애, 아빠랑 나란히 걷는 모습이 참으로 좋았어.”
라는 네 말이 가슴을 파고든다. 아빠에 대한 그리움도 묻어나고.
“내 인생 최고의 여행은 아빠랑 함께 탔던 눈썰매야. 하루 종일 탔잖아.”
너는 언제나 아빠와 함께 눈썰매를 탔던 스위스 여행, 온 가족이 자전거로 여행했던 일본 여행을 최고로 생각했잖아. 초등학교에 다니기 전만 해도 엄마보다 아빠랑 더 친했고. 그래서 어린이집 다닐 때 썼던 육아일기에도 아빠가 쓴 게 제법 보이더라. 너랑 아빠의 흔적을 더듬으러 나는 또 그때의 일기를 꺼내 든다. 세상에 ‘아이들 세상 어린이집’에 다닐 때 썼던 육아일기가 총 24권이나 되더구나. 정말 꼼꼼히, 착실하게 쓴 육아일기야. 이건 암만 생각해도 네 인생 최고의 보물 중 하나란 생각이 든다.
18개월. 네가 처음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했을 때였어. 1월에 태어난 너를 두고 엄마는 3월부터 학교에 출근해야 했거든. 그때는 출산휴가가 2개월밖에 안 되었어. 한동안 명륜동에 살던 첫째 고모가 너를 돌봤어. 그래서 매일 아침 아빠가 너를 자동차 뒷좌석에 싣고 명륜동까지 데리고 갔단다. 그러면 퇴근길에 엄마가 지하철로 너를 데리고 왔어. 그런데 두 달쯤 뒤에 고모에게 사정이 생겨 그때부터는 앞집 근민 엄마가 너를 돌봤지.
구서동 금강아파트 아래 주택가에 살 때였어. 그때 너는 동네 꼬마였단다. 모르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사람 좋아하는 근민 엄마 등에 업혀 동네 곳곳을 다닌 덕분이었어. 일요일에 너를 데리고 공중목욕탕에라도 가면 사람들이 엄마는 몰라도 너는 알아보고 “산들이 왔구나!”라며 귀여워했으니까.
그러다가 근민 할머니가 위암으로 병원에 입원하시는 바람에 너를 더 이상 돌볼 수가 없었단다. 그래서 너는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했어. ‘아이들 세상 어린이집’. 그곳이 아니었다면 네 유년기는 어땠을까? 상상할 수도 없구나. 어린이집은 엄마와 아빠 다음으로 네게 큰 영향을 준 곳이니까. 아침잠이 많던 아빠 덕에 너까지 늦잠을 자서 자주 어린이집에 지각해서 아이들의 나들이 장소를 찾아다녔잖아. 아빠의 손을 잡고, 때로는 아빠의 자전거에 실려서, 또 때로는 차에 실려서. 너는 그걸 아빠와 너만의 좋은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잖아. 아빠와 소중한 시간을 보내어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빠가 썼던 일기 몇 편 보낸다. 특히 2001년 겨울에 엄마 혼자 인도 여행을 떠난 보름 동안 두 사람이 함께 보낸 일기를 보니 참으로 애틋하더라. 집에 돌아오면 그때의 일기를 몽땅 읽어보렴. 좋은 추억이 될거야.
1998.9.05. 금
산들이는 엄마에게 무엇이 섭섭했는지 저녁 내내 울고, 엄마는 역정만 냈던 모양인데, 아빠가 들어오자 산들이는 설움에 복받쳐 크게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산들이를 누가....”했더니 울면서 “엄마가...”했습니다. 아빠의 중재로 화해가 된 모녀는 금방 히히거렸습니다. 산들이 엄마는 저녁 11시만 되면 눈이 가물가물해 보겠다고 빌려온 비디오나 TV프로를 못 보고 자기 일쑤인데, 산들이가 반 정도는 자지 않고 엄마 옆에서 엎치락 뒤치락 할 때가 많습니다. 오늘도 모기장을 들락날락하더니 늦게 잠들었습니다. 혼자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하기 시작한 엄마 덕에 부녀는 이틀 연속 늦잠입니다.
1999.03.23. 화요일
갑작스러운 산들이 엄마의 가정 방문으로 산들이는 이틀 연달아 ‘즐거운 서실 생활’을 했습니다. 인색한 아빠가 그 동한 한 번도 산들이에게 붓과 종이를 맡기지 않았는데, 오늘 처음으로 연필 굵기의 붓으로 70 cm×35cm 크기의 화선지에 맘껏 먹물을 찍어 낙서를 하게 했습니다. 농담과 굵고 가늘게 표현하는 방법의 설명 없이 그냥 내어 맡겼는데, 비교적 굵은 선으로 그리거나 공룡알이라며 타원을 그리고 채워 넣는 식의 표현을 주로 썼습니다. 너무 많이 먹을 찍어 채우는 바람에 책상까지 흥건하게 먹물이 배이기도 했습니다. 제멋대로 반 정도는 한 시간 정도의 장난 그림 계획을 세워 정기적으로 서실 나들이를 해도 아이들에게는 재미있고 유익하겠다 싶습니다.
2000. 3. 9. 목요일
요즘 잠을 자면 무섭게 잡니다. 부통 12시간 이상씩. 아침에 원피를 입으려고 찾아놓았다가 스타킹을 못 찾자, 아빠가 그냥 바지 입고 가자고 했더니 기분이 좀 틀어졌습니다. 아침의 기분은 주로 옷 때문입니다. 그래서 보통 스스로 옷을 고르게 합니다.
2001. 12.27. 수요일
산들이 엄마는 초저녁에 아이들 보랴, 여행 준비하랴 정신이 없었습니다. 산들이는 저녁에 놀러 온 경빈이, 현태, 한별이, 예은이에게 선물 자랑과 선물 나눠주기에 정신이 없었습니다. 며칠 전 일본으로 외증조할아버지 미수 생신을 위하여 다녀온 외할머니로부터 지갑, 휴지, 인형을 선물 받은 산들이는 친구들에게 뭘 좋아하는지 물어보고 하나씩 나눠주었습니다. 여행 준비를 다 해 놓은 엄마에게 산들이는 가볍게 “가지 마.”라고 해 떨어지기 싫음을 표시했습니다. 엄마가 출발하기 20분 전 엄마가 읽어주는 동화를 들으며 잠이 들었습니다. 아빠와 함께 있는 것에 익숙해 있어 아침에도 “엄마는?” 한 마디만 할 뿐 일상과 같네요.
2001.12.28. 목요일
요즘 식사 메뉴는 비빔밥입니다. 아이에게 골고루 먹이려면 비빔밥이 최고지요. 제가 산들이 엄마에게 비빔밥 용으로 특별히 부탁해서 만들어 놓은 것이 소고기 볶음, 잔멸치 볶음, 어묵인데, 여기에다 김이 항상 기본으로 들어가고 요즘은 김치 썬 것, 동김치 썬 것, 산들이가 싫어하는 야채도 잘게 잘라 조금 넣어주면 잘 먹습니다. 당분간 이렇게 먹을 겁니다. 집에서 저녁을 먹고 서예원에 가서 서류 정리로 정신이 없는 아빠 옆에서 빈 종이 곽으로 배, 사진기 등을 칼, 가위, 테이프로 만든다고 정신이 없네요. mp3파일에 산들이 좋아하는 동요를 넣어 놓고 들려주니 아주 좋아하네요. 음질은 떨어지지만 듣고 싶은 것만 선택해서 들을 수 있는 장점이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