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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요 Feb 18. 2019

운명의 수레바퀴

오랜만에 글을 쓰고자 한다.

그동안 글을 쓰지 않았던 이유는 그냥, 별 이유는 없었다.

쓰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랬던 내가 이제는 글을 쓰고 싶은 이유는, 글을 써야 할 만큼

힘이 든 시기가 돌아온 것 같아서.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해서 가장 안 좋은 습관 중에 하나가

자꾸만 남의 작품과 나의 작품과 모두의 작품을 평가한다는 것이다.

객관적인 평가는 물론 무엇보다 중요하긴 하지만

품평에 지나지 않는 가짢은 평가가 자꾸 글쓰기를 주저하게 만든다.


누구나 글을 쓸 수 있고 모두의 글이 소중한만큼

그 소중한 글들을 왜 자꾸만 평가의 언어들로 재단하고 지레짐작하면서

완벽에 가까운 글로 만드려고 하는지,

결국엔 그래 봤자 시대의 흐름에 따라서 글들이 모두 자취를 감춰버리는데

그 책임이 평가의 언어 운운하면서 각자의 생각을 깎아내리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그동안에 글쓰기를 주저한 바 있다.


글을 써봤자 무엇하냐라는 말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건

다시 한번 내 감정을 토로할 만한 통로가 필요했음을 인정하고 실행하기 위함이었다.



난 비겁했다. 세상에 대해 피하려고 노력하고 내 감정에 대해서도 직면하지 않으려 했다.

좋지 않은 마음을 가지고 세상의 요구를 담담히 받아들이면서 남들과 똑같은 부속품으로 살고자 했다.

그렇기에 나의 솔직한 마음을 내비치지 않은 채 면접에 임했었다.

고양 모 센터에 면접을 봤을 때도 그저 될까, 라는 마음을 가지고 임했었지만

그저, 는 확신이 되어 혹시라는 마음으로 변모했다.

센터에 대해서 알아보면 알아볼수록 그리고 면접을 1차, 2차 합격할수록

나의 기대와 희망도 부풀었다.

그 이후의 계획도 세웠던 것 같다.


감히, 주제넘게, 삶이란 놈을 가볍게 봤었다.

나의 2월은 찬란할 것이라는 꿈과 희망을 그리면서

그리되어 이젠 백수란 타이틀을 버리고 더 나은 삶을 위한 토대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 오랜 기다림 끝에 나의 버스가 오리라는 큰 기대도 품었다.


그러나, 보기 좋게, 삶은 그 기대를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어쭈, 네가 발악하네, 네가 감히, 라는 그런 뉘앙스로

나의 기대를 보기 좋게 산산조각 내버렸다.


그러자 내가 가지고 있던 긍정이 산산조각 부서졌고

파괴하고 싶어 졌고 욕도 하고 싶어 졌고 화가 났었다.

한편으로는 이렇게밖에 될 수 없는 운명의 수레바퀴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과연 있을 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패배와 실패를 아주 담담하게, 또 초연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별 수가 없었으니까, 나의 삶은 나의 기대에 만족시켜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또다시 인정할 수밖에 없으니까, 그 인정을 해야만 다른 단계로 가야 된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으니까.


근데 과연 나는 이 삶의 굴레에서 이겨낼 수 있을까라는 생각과

수레바퀴 바깥으로 한 뼘도 나아가지 못한다는 사실에 겁이 났다.

겁쟁이가 맞았다.

부속품이 되기 싫은 마음을 숨기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맞춰줘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생각에

타협하려 했다.

타협은 보기 좋게 깨졌고 이미 본심은 그게 아님에도 자꾸만 속이는 일에 집중했다.

그렇다. 진실하지 못했다.

진실되고 솔직했다면 이리 깨졌다 해도 그리 미련이 남지 않았지만

그리되지도 못했으니 더 미련이 남고 더 애절했다.


항상 왜 미련이 남고 애절한 쪽이 항상 질까라는 생각을 했다.

더 좋아하는 쪽이 지고, 사랑에도 권력이 작용하고

면접에서도 갑과 을이 작용하고

살아가는 데에도 모든 사이는 권력이 작용했다.


권력을 가지고 있는 쪽에서는 좋았지만

권력을 가지지 않은 쪽에서는 항상 슬펐다.


승자가 있었고 패자가 있었고

이 승자와 패자를 결정짓는 거대한 피라미드가 있었다.


피라미드에 오르려고 모두가 한결같이 다른 이들의 아픔은 신경 쓰지 않은 채

나만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도 베푸는 마음을 거둔 지 오래되었다.

어쩌면 사회와 현실에 점점 타협하는 쪽으로 나 자신이 변해가고 있었다.


거대한 이상과 사랑과 설렘도 모두 돈이 없음으로 인해서 쓸모없는 것들이 되어버렸다.

자본은 우리의 생각과 이상과 설렘도 잡아먹었고 그들에게 더 많은 자본을 가지라고 가르쳤다.

우리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줄 수 있다고 말이다.

근데 나는 그리 믿으면서 항상 상품을 샀고 그 상품을 사면 공허함과 적막함이 해결될 줄 알았지만

갈증과 공허는 더해만 갔다. 부족함이 없었지만 채워지지 않았다.

욕망은 쉽사리 꺼지지 않았고 욕망을 동력 삼아 달리는 자본이라는 폭주기관차는 우리를 가로지르며

가장 빠르게 지나갔다.

난 잡을 수 없었고 이번엔 3차 면접에서 최종 탈락했다.

탈락했을 때 느꼈던 패배감은 잊을 수 없는 것이었다.


패배감보다 더 쓰라렸던 건

최저시급을 주는 곳을 널렸지만, 최저시급보다 더 안주는 곳은 더 널렸지만

그곳에서는 나를 찾는다는 것이었고

최저시급을 주는 곳은 나를 찾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의 인생이 최저시급밖에 받지 못한다는 그런 생각에, 그런 절망감에

더 슬픔으로 잦아들었던 것 같다.


글의 해결책이나 희망이나 긍정은 없다.

내 감정의 토로고 나의 현실이니까.

바뀌고 싶고 바꾸고 싶지만

해결되지 않는 굴레처럼

그렇게 챗바퀴를 난 또 굴리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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