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랫동안 잘못 달리고 있었다
뭐야, 나 생각보다 잘 뛰잖아?
제대하면 마라톤이나 해볼까?
마라톤 풀코스 완주하기 -그것도 3시간 안에 완주하는 일명 '서브-3'- 는 스물두 살에 제대하고 나오면서 8년 뒤인 서른 살까지 달성하기로 했던 위시리스트 중 하나였다. 그 서른 살이 이제 보름도 채 남지 않은 지금, 이 목표는 이미 글렀다. 군대에서 아침마다 강제로(!) 달리기를 하면서, 나는 의외로 잘 뛰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공으로 하는 운동에는 영 소질이 없었던 내게 달리기는 곧 좋은 취미가 되었다.
2013년에 처음 나이키의 러닝 앱을 깔아놓고 집 근처 운동장을 달리기 시작했다. 앱을 켜놓고 달리면 1km마다 시간과 현재 페이스를 알려주는데, 그게 그렇게 재미있을 줄은 몰랐다. 한 번에 뛸 수 있는 거리가 점점 늘어났고, 매 러닝마다 기록되는 페이스도 덩달아 빨라졌다.
러닝 앱에서는 성과에 따라 여러 가지 보상을 줬다. 신기록을 세울 때마다 알려줬고, 오래 그리고 자주 뛰어주면 칭찬 메시지를 아끼지 않았다. 매주, 매달마다 어떤 친구가 가장 먼 거리를 뛰었는지 재볼 수 있는 순위표도 있었다. 눈으로 보이는 기록이 주는 뿌듯함에 한때는 미쳐 살았다. 연속 러닝 기록을 유지하고 싶어서 비 오는 날에 나가 뛰기도 했고, 꼭두새벽에 뛰기도 했으며 순위표 1등을 차지하기 위해 한밤중에 나가서 더 뛰기도 했다.
문제는 욕심이었다. 더 멀리, 더 빨리 달리고 싶었다. 내 주변의 그 누구보다도 잘 달려서, 늘 말라빠진 약골로만 보던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싶었다. 나의 뛰어난, 나아가 '특출난' 모습을 더 많은 사람들이 알아주고 인정해주었으면 했다.
그렇게 인정 욕구에 목마른 채로 한참을 달렸다. 늘 스스로와의 싸움을 벌였다. 러닝 앱을 켜놓고, 실시간으로 페이스가 줄어드는지 아닌지를 확인하면서 뛰었다. 앞에서 달리는 누군가 보인다 하면 일단 제쳐놓고 봐야 마음이 놓였다. 주위를 돌아볼 겨를은 없었다. 운동하는 사람들 틈을 지그재그로 파고들면서 달렸다. 중간에 조금이라도 속도를 늦추거나 멈춰버리면 기록이 떨어질 테니까. 아,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민망하고 아찔한 기억이다.
아무튼, 러닝 앱에 기록되어 있는 내 최고 기록은 전부 그해에 세웠다. 한 달에 100km 가까운 거리를 뛰었다거나, 10km를 41분에 끊었다거나. 달리기를 취미로 하는 지인들의 기록보다 내 기록이 좋을 때마다, 지인들이 놀랄 때마다 나는 묘한 우월감을 느꼈다. 비로소 인정받은 기분이었다.
'너 정말 잘 뛰는구나!', '그걸 이제 알았냐?'
달리기는 있는 그대로 달리면 되는 운동이지만, 그렇다고 마구잡이로 달리면 몸이 상하고 닳는다. 몸을 잘 관리하는 방법도, 잘 달리는 방법도 모르면서 무식하게 뛰어대기만 했으니 그게 멀쩡할 리가. '그냥 뛰다 보면 몸은 저절로 풀린다'는 이상한 이야기나 주워듣고 뛰니 곧 무릎에 탈이 났다. 3km만 넘어가면 무릎에 찌릿함이 느껴졌고, 제 속도를 낼 수 없었다. 일주일에 네댓 번도 할 수 있었던 10km를 달릴 수 없게 되었다. 더 이상 이전만큼의 성과를 낼 수 없겠다는 생각이 덜컥 들자, 순식간에 달리기에 정이 떨어졌다. 그 이후 오랫동안 달리지 않았다.
달리기를 다시 시작한 건 올해 봄부터였다. 일하면서 쌓이는 스트레스를 어디에도 풀 곳이 없었고, 마침 이사한 집 앞에는 커다란 하천이 있었다. 무릎이 신경 쓰였고, 여전히 따로 배운 건 없지만 오랫동안 몸을 풀었다.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 속도를 늦추니 무릎에서 신호가 오지 않았다.
하지만 옛날보다 1분이나 뒤쳐진 페이스를 보면서 달리는 건 좀처럼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진 것 같았고, 어딘가에서 평가절하되는 것 같았고, 마음이 조급해졌다. 앞으로 튀어나가고 싶었다. 기록으로 증명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제는 이게 내 모습인걸.
천천히 달리면서 숨을 골랐다. 주위의 모습이 보였다. 나처럼 달리는 사람들, 삼삼오오 걷는 사람들, 운동기구에 매달려 있는 사람들, 하천에 비친 불빛들, 산책 나온 강아지들. 잠깐만. 나는 그동안 이런 것도 안 보고, 핸드폰에 뜨는 내 페이스만 쳐다보면서 달렸던 거구나. 여기는 기록으로 승부하는 경기장이 아닌데, 혼자서만 괜히 용쓰면서 달렸구나. 그동안 나는 누구를 위해서 달렸던 거지. 맥이 풀리면서도 개운했다.
지금은 달리는 횟수와 속도, 거리를 모두 줄였다. 집에 있기가 답답해서 뛰고 싶어 지면 나가고, 그렇지 않거나 다리가 아프면 그냥 쉰다. 몇 주 연속, 몇 개월 연속 기록에는 너무 큰 의미를 두지 않기로 했다. 물론 달성하면 좋겠지만. 나가서는 온갖 체조와 스트레칭을 다 해가면서 몸을 풀어주고, 주위를 이리저리 산책하다가 뒤늦게 뛰기도 한다. 뛰다가 누군가 앞질러가면 잘 뛰시네, 하고는 보낸다. 대부분 한 번에 뛰기는 하지만 길 위에서도 멈추고 싶을 때가 있으면 그냥 멈추고, 다시 달리고 싶을 때가 되면 달린다. 아, 이렇게 마음대로 달릴 수 있는 거였는데.
달리기가 다시 재미있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