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경샘이 바뀐 일정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 두 번째 줄어 규호가 학교 후드티 모자를 푹 눌러쓰고 책상에 엎어져 있습니다. 짝꿍이 팔꿈치로 툭툭 쳐서 깨우자 천천히 몸을 일으킵니다. 앞머리는 떡져있고 눈은 토끼처럼 빨갛습니다. 그런 규호의 모습에 아이들이 키득댑니다.
"수요일에 강당에 가서 남녀 번호대로 두줄로 앉으세요."
1학년 전체가 강당에서 행사가 있을 때 어떻게 앉아야 하는지 설명하고 있는데 갑자기 규호가 손을 듭니다.
"어~ 규호~ 왜?"
"선생님. 근데... 번호는 어떻게 정하는 거예요?"
규호의 생뚱맞은 질문에 맨 뒷자리 동진이가 큰소리로 답합니다.
"병신아~ 이름순이잖아! 한글을 모르니 알 턱이 있나!"
"으하하하~~~~!!"
동진이의 말에 아이들이 빵~ 터졌습니다.
규호는 동진이를 노려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규호는 엄마가 베트남 사람인 다문화 가정의 학생입니다.
학기 초 맥락에 맞지 않은 질문을 계속해서 좀 특이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수업 시간에 단어의 뜻을 교과서에 잘 적고 있는지 확인하려 돌아다니다 규호의 교과서를 보게 되었습니다. 화면에 보이는 한글뜻을 그대로 베껴쓰기만 하면 되는데 규호는 한글도 영어도 아닌 이상한 부호들을 잔뜩 적어놨습니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민경샘은 학기 초 적어냈던 가정환경 조사서를 다시 살펴봤습니다.
아빠, 누나, 규호... 이렇게 세 식구만 있고 엄마는 없었습니다.
이혼가정은 워낙 많아 이걸로는 원인을 알 수 없어 규호의 누나 반 선생님에게 물어보고 다문화 가정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점심시간
반찬으로 우엉조림이 나왔습니다.
밥을 받고 지나가던 규호는 민경샘을 보자 이게 뭐냐고 물어봅니다.
"아~ 그거 우엉조림이야~ 규호 처음 먹어봐?"
"우어요?"
"아니.. 우엉"
"우어?"
어느 날 오후
규호와 동진이가 복도에서 싸워 체육 선생님에게 잡혀 교무실로 끌려왔습니다.
둘이 대화하던 중 규호가 말귀를 잘 못 알아들으니 참을성이 부족한 동진이가 '장애인 새끼'라고 욕을 했고, 그래서 싸우게 됐다는 것입니다.
동진이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아이들이 한국말이 서툰 규호를 기다려주거나 이해해 주지 않았습니다. 조금만 답답하면 욕을 하거나 소외시켜 버립니다. 그래서 그나마 자신을 비난하지 않는 선생님들에게 붙어 궁금한 것을 물어보곤 했습니다.
나중에 아버님과의 통화에서 규호는 한국에서 태어나 계속 한국에서 자랐지만 말도 늦게 트이고 한글도 4학년 때 다 배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2년 전 엄마는 아이들을 두고 집을 나갔다고 합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베트남에서 결혼 전에 낳았던 친아들을 한국으로 초청해 같이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규호에게는 이것까지는 말하지 않았다고 하시며 전화통화를 마쳤습니다. 잠시 생각에 빠졌던 민경샘은 내선 전화로 생활인권부 부장님께 연락해 다문화 가정 자녀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이 있는지 확인해 봅니다.
아침 조회가 끝나고 복도로 나온 민경샘은 교실 앞에서 동진이과 마주칩니다.
지각한 것에 대해 지도하려고 앞으로 다가갔다가 동진이 빰에 멍자국을 발견합니다.
"동진아~ 얼굴에 왜 멍이 들었어? 다쳤니?"
"....... 아빠한테 맞았는데요."
사실 몇 주전에도 입술 옆이 찢어져 있어서 이유를 물어볼까 하다가 넘어간 적이 있어 이번엔 자세히 물어봅니다. 입술도 아빠한테 맞아서 찢어졌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평소에 지각을 자주 해서 어머님과 통화한 적이 있었습니다. 5학년때부터 잦은 지각으로 무수히 지도해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고 합니다.
"아버님과 상의해 보셨나요?"
민경샘 질문에 동진이 어머님은 화들짝 놀라 소리칩니다
"동진이 아빠가 알면 절대 안돼요! 애 죽어요!"
그런데 입술이 찢어졌던 날
평소와 달리 아침 일찍 일을 하러 나가지 않았던 아버지가 학교 갈 시간이 훌쩍 넘었는데도 집에 있는 아들을 발견했고 그렇게 아버지에게 엄청 맞았던 것이었습니다.
평소 언행과 행동이 거칠어서 속을 썩게 했던 동진이의 행동 패턴을 민경샘은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선생님~ 나연한테서 냄새나요!"
나연이 주변 여자 아이들이 손으로 코를 막으며 말합니다.
나연이는 키가 작고 늘 힘이 없는 민경샘반 여학생입니다.
말도 별로 없고 친구들과도 어울려 다니지 않아 체험학습을 갔을 때도 혼자 다녀마음이 쓰였습니다. 최근에는 점심 급식도 잘 먹지 않고 교실에 혼자 앉아있기도 해서 더욱 걱정이 되었습니다.
수업시간에 나연이랑 짝을 하게 되면 아이들이 온몸으로 거부를 했습니다. 그런 아이들을 달래며 함께 활동을 하게 하려고 했지만 사실 민경샘도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항상 교복 카라가 빨지 않은 것처럼 더럽고 몸에선 꼬릿한 냄새가 났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느 날 나연이는 연락 없이 학교를 나오지 않았습니다.
하루종일 아무 연락이 없어 가정환경 기록을 살펴보니 아빠와 할아버지, 이렇게 세 명이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하교시간 무렵 아버지에게 연락하니 아침에 나연이가 학교가 쉬는 날이라고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음날 등교한 나연이에게 반성문을 쓰게 했습니다. 그런데 나연이가 쓴 반성문을 읽던 민경샘은 깜짝 놀랐습니다. 분명 한국말로 쓰여 있는데... 주술 관계가 하나도 맞지 않은... 마치 초등학교 1학년 학생 수준의 문장이었습니다.
아버님과의 통화를 통해 나연이가 어릴 때 엄마는 집을 나갔고, 이혼 후에는 할아버지와 셋이 살게 되었는데 밥이며... 빨래며... 유일한 여자인 나연이가 거의 다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린 아이다 보니 여벌 빨래까지 하지 못한 것 같았습니다.
벌청소를 하고 있는 나연이의 힘없는 뒷모습을 보며 민경샘은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했습니다.
가을 어느 날
학교 인성 프로그램으로 가족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사진을 찍어 활동지에 붙이고 식사 중 나눈 대화를 써서 내는 대회를 실시했습니다. 사진을 가져와야 하기 때문에 대회 3주 전부터 매일 조회시간마다 아이들에게 알렸습니다.
대회 당일
가족과 식사하는 사진을 가져온 친구는 단 2명...
그중에 한 명도 아버지하고만 찍은 사진이었습니다.
3주 내내 공지했는데 준비하지 않은 것에 대해 화가 난 민경샘은 대회가 끝나고 반 전체 아이들을 단체로 혼을 냈습니다.
다음 수업 시간이 시작되어 훈계를 마치고 나가려는데 앞자리에 앉아있던 여자 아이들이 조심스럽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죄송해요... 사진 찍고 싶었는데... 3주 동안 부모님을 못 만나서요... 찍을 수가 없었어요..."
"저는 엄마한테 학교에 가져가야 하니 사진 찍자고 했는데 피곤하다고 주무셨어요."
"저희 부모님은 하루종일 주무세요. 밥도 늘 저 혼자 먹어서..."
아이들이 자신의 지도를 듣지 않았다는 생각에 화가 났던 민경샘의 마음 한구석이 속상함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