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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sylvia Dec 21. 2024

꼭 해야 해요?

의지와 열정이 없는 아이들



평소보다 조금 이른 아침


민경샘은 1교시 전에 영어과 교과협의록 제출을 해야 해서 일찍 출근했습니다.

교무실로 가는 길에 보니 4반 교실이 너무 어두컴컴합니다.

그래도 몇 명은 등교했을 시간인데… 한 명도 안온 건가? 의아한 마음에 교실문을 여니

휴대폰 불빛에 빛나는 아이들의 얼굴이 보입니다. 10명 정도의 아이들이 불도 켜지 않은 채 어둠 속에 앉아 있습니다.


“아… 왜 이렇게 어둡게 하고 있어~ 불 켤게요! “

“아~~~~~”

민경샘이 불을 켜자 아이들의 낮은 탄식이 들려옵니다. 탄식을 뒤로하고 해야 할 업무를 처리하러 부랴부랴 교무실로 향합니다.



아침 직원 조회에 참여하러 2층 대회의실로 들어서니 평소와 다른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어제 병원 진료 때문에 3시쯤 조퇴했었던 민경샘은   궁금해집니다

“어… 무슨 일 있어요? 어제 조퇴를 해서…”

옆자리에 앉은 2학년 영어 선생님이 어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줍니다.


어제 6교시

최근 그나마 얌전했던 경후가 수업 중 같은 반 영민이와 사소한 시비가 붙었고 바로 그 자리에서 몸싸움이 일어났습니다.

2주일 전쯤  경후가 하굣길에 교문 앞에서 규철이의 빰을 수차례 때린 일이 있었습니다. 몇 주 전 싸웠던 일에 대한 보복이었습니다. 그때 영민이가 나타나 규철이를 말렸는데 덩치가 큰 영민이에게 힘으로 밀려 더 이상 공격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마침 이때가 하교 시간이라 이 현장을 많은 학생들이 직접 보게 되었고 그 후에 경후가 알고 보니 별거 없다는 소문이 전교에 돌았었습니다.

가오로 버티는 경후에게 이번 일은 치명타였습니다. 빨리 자신의 자존심을 회복하는 게 급선무였을 것입니다. 그러던 차에 영민이과 시비가 붙었고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맹렬하게 달려들었을 겁니다.


수업 중 일어난 격렬한 싸움에 교실은 난장판이 되었습니다. 교실에 있었던 미술 선생님은 두 아이의 싸움을 말렸고 그 과정에서 이미 돌아버린 경후는 선생님에게도 욕설과 함께 주먹을 날리게 된 것입니다.


이미 쌓일 데로 쌓인 교칙위반과 학폭 사건에 교사 폭행까지 더해져 학교 안에서 해결할 수 있는 선을 넘어섰습니다. 경찰과 학교운영 위원회, 그리고 그렇게도 연락을 피하던 경후 아버지가 모두 입회한 자리에서 경후에게 보호조치 및 강제 전학 처분이 내려집니다. 이때 미술 선생님이 노트북에 켜 놓은 비디오 캠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1교시 민경샘의 수업시간

1학년이 시작된 지 벌써 수개월이 지나 이제 겨울의 기운이 느껴집니다.

하지만 여전히 책을 안 가져오거나 책이 있어도 펴지 않고 가만히 앉아있는 학생들도 있습니다.

아이들을 앉게 하고 책을 꺼내고 진도 나가는 부분을 펼치게 하는데 아직도 꽤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겨우 다 확인하고 수업을 시작합니다.

오늘은 비교급을 배우는 날입니다. 준비한 영상과 프레젠테이션 화면을 번갈아 보여주며 비교급 형태를 설명합니다. 교과서에 있는 영어 문장의 한글 해석을 화면에 띄우고 각자 교과서에 쓰게 한 뒤 교실 한 바퀴를 돕니다.


맨 뒷자리에 앉은 지영이는 수업이 시작한 지 꽤 됐는데도 아직까지 책을 펴지 않았습니다.

두껍게 칠한 아이라인과 코 위에 번쩍이는 하이라이트, 그리고 홍두깨 여사같이 넓게 그린 입술이 눈에 띄었지만 우선 수업에 참여하게 하는 게 먼저였습니다.


"지영아~ 책 펴야지."

지영이는 민경샘을 한 번 쳐다보더니 그대로 앉아 있습니다.

"지영! 책 펴세요."

"어디요?"

"126페이지. 지영아~ 어딘지 모르면 옆 사람 책을 보면 되겠지?"

지영이는 천천히 책을 펴고 다시 가만히 있습니다.

"화면에 보이는 한글을 여기에 베껴 쓰세요."

해야 할 일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지영아~ 여기에 저 문장을 쓰라고~ 연필 꺼내봐요."

"연필 없는데요."

"필통 꺼내봐~"

"필통 없는데요."

"학교에 오는데 필통을 안 가져왔어?"

"네."

"가방은 어디 있니?"

"가방 없는데요."


필기구도... 필통도... 가방도 없이 학교에 왔다고? 어이가 없었지만 계속 한 학생만 지도할 수 없어 들고 있던 펜을 손에 쥐어주고 교실 앞으로 와서 수업을 진행합니다.

하지만 지영이는 남은 수업 시간 내내 어떤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2교시

5반 수업에서 영어 수행평가를 치렀습니다.

일주일 전 수업시간에 교과서에 있는 핵심 문장을 5개를 이용해 만든 수행평가를 답과 함께 공지했습니다.

설령 이해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짧은 영어 문장 3개만 통으로 외우면 만점을 받을 수 있는 쉬운 수행평가입니다.


책상 위를 깨끗이 치우게 하고 시험지를 나눠줍니다. 반 정도 되는 학생들이 이름만 쓰고 바로 책상에 엎드립니다. 뭔가를 계속 쓰고 있는 학생은 몇 명 안됩니다. 시험을 마치고 교무실에 돌아와 살펴보니 만점을 받은 학생은 25명 중 4명에 불과합니다. 아무것도 쓰지 않고 빈 종이로 제출한 학생은 10명이었습니다.



점심시간

답답한 마음에 기술가정 담당 수지 선생님에게 수행평가에 대해 토로합니다.

"영어라... 어려워서 학생들이 답을 못쓰는 건지... 답을 다 알려줬는데... 얼마나 더 쉽게 내야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민경샘의 하소연에 쓴웃음을 지며 수지샘이 답합니다.

"선생님... 영어라서 그런 건 아닌 거 같아요. 저도 답을 다 알려주었는데도 거의 빈종이로 요. 게다가 마지막 질문이 가족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을 적으세요였는데... 아무거나 적어도 되는데... 그조차 아무것도 안 적었더라구요."




연말 행사 중 하나로 '친구 사랑 표현하기' 대회가  열렸습니다. 친구를 사랑하는 마음을 표어, 편지, 초상화로 표현하는 인성교육 차원의 교내대회입니다. 마침 민경생의 담당 반인 4반 수업 시간에 대회가 열렸습니다.


교실에 들어가 제출용 종이를 나눠주고 있는데 창가에 앉아 있던 소율이가 손을 들고 질문을 합니다.

"선생님! 이거 꼭 해야 해요?"

"소율아... 꼭! 해야 하는 건 없어. 근데... 학교에서 하는 인성교육의 일환이니까 참여해 보는 게 좋지 않을까? 결과물이 좋으면 교내상도 받을 수 있고~"

민경샘의 설명에 소율이의 얼굴은 실망감이 가득합니다.


종이를 받은 아이들은 이름을 쓴 후 멍하게 앉아 있습니다. 종이를 받자마자 구겨서 책상 한쪽 구석에 던져놓은 아이도 있습니다. 이미 5명은 엎드렸습니다. 26명 중 고작 5~6명이 뭔가를 하고 있습니다.

수업시간이 거의 끝날 무렵 종이를 걷었습니다. 친구 이름을 크게 한가운데에 적은 한 장을 제외하고 제출할만한 건 4장 정도...

한숨이 나옵니다.




수업에서도

학교 행사에서도

심지어 가장 신나야 할 축제를 준비할 때도


아이들은 의지와 열정이 없습니다.

가장 에너지가 넘치고 엉뚱한 생각으로 반짝여야 할 아이들이 어두운 교실에서 폰 불빛에만 집중하면서

오늘내일이 똑같은 무료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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