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3/16 패키징, 혁신과 지속가능성 컨퍼런스 후기
기업이 사회/환경 문제 해결에
참여해야 한다는 기대가 높아지고 있다.
단순하지 않은 사회다. 기업들도 그렇다. 시장에서 누구보다 빠르게 기회를 발굴하고, 시장을 선점하고 또 유지하는 것만이 경영전략의 전부로 여겨지던 시대도 있었다. 지금은 어떤가? 기업들이 시장에서 치열하게 경쟁하기에도 바쁜데 옆에서 감 놔라, 배 놔라 잔소리하는 시어머니들이 많아지고 있다. 기업들이 사회적인 책임을 가지고 지역사회에 기여도 좀 하고, 좋은 일자리도 만들고, 더 나아가 사회문제와 지구환경문제 해결에도 앞장서 달라는 요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또한 기업이 윤리적이고 정정당당하게 수익을 올려야 한다며 외부에서 감시하는 눈초리도 많아졌다.
사회에서 이처럼 기업에게 본래의 역할을 넘어선 책임을 요구하는 건 단순히 기업 역시 사회에 속한 조직으로서 도덕적인 책임을 지닌 존재라고 보기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인류가 마주한 사회/환경문제를 더이상 정부나 시민사회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어 기업의 참여가 절실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기업은 태생적으로 경쟁에서 승리하고자 새로운 해결책을 모색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는 조직이다. 이러한 기업의 본능적 에너지를 사회/환경문제 해결에 쏟게할 수만 있다면, 우리가 우려하는 상당수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기업들이 고민 끝에 내놓은 값싸고 창의적인 제품과 서비스로 하여금 저개발국가 국민들의 삶의 질을 개선하고, 온실가스를 감축하는 등 여러 사회/환경 문제 해결에 기여할 수 있다.
기업이라는 조직이 이전과는 다르게 사회/환경 문제 해결의 주체로 역할을 해야 한다는 기대를 받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기업의 본연의 역할은 시장에서 소비자들이 만족할 수 있는 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하고, 회사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라고 아무리 설명해 봐야 소용이 없다. 어쨋든 우리 인류가 더 잘살기 위해서는 사회/환경 문제는 해결해야만 한다. 기업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사회/환경문제 해결에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걸로 보이기 때문에 이런 기대는 계속될 것이다.
기업의 개념이 경제적 주체에서
사회적 주체로 까지 확장되고 있다.
기업들은 지금 갈림길에 서 있다. 전통적인 '기업'의 개념에 스스로의 조직을 가두며 경제적 주체로 남아 있을 것인지, '기업'의 개념에 머무르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기대를 충족시키며 사회적 존재로 진화해 나갈 것인지. 콜롬부스가 미개척 신대륙을 발견하는 모험을 떠난 것처럼 IKEA, Unilever 같은 기업은 이미 자신들을 사회적 주체로 인식하며 활동 영역을 시장에서 사회로 넓혀가고 있다. 이런 도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기업들은 돋보일테지만, 모든 기업이 이 새로운 모험을 감당해낼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최근 고민하고 있는 문제가 바로 이 점이다. 내가 속한 기업이 사회적 요구를 충족시키는 주체로 진화해 나갈 수 있을 것이냐?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준비 과정이 필요하고, 어디서부터 바꿔나가야 하는가? 아니면 이런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겠다는 것 자체가 우리 기업에게 지나친 욕심인 것이냐? 사회 전반적인 트렌드는 비교적 명확하게 답변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속한 내 조직의 관점에서 의사결정을 한다면 선뜻 답을 내리기는 어렵다.
이렇듯 서론을 주절주절 쓴 이유는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 와중에 지난 6월 23일에 열린 '패키징, 혁신과 지속가능성' 컨퍼런스에 다녀와서 들었던 생각을 정리하고자 함이다. 주제가 패키징이라는 특정 산업분야에 국한되기는 했지만, 혁신과 지속가능성의 연결고리는 사실 모든 산업에 걸쳐 적용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런 종류의 컨퍼런스를 가면 주의해야 할 점이 하나 있다. 컨퍼런스를 주최하고 참여하는 기관이나 기업들은 다 한통속이라는 것이다. 컨퍼런스에서 논의되는 주제가 더욱 확산될수록 자신들의 입지는 굳어진다. 그 주제가 지향하는 방향에 상관없이 일종의 편향적인 주장들이 많으며, 희망으로 가득찬 미래를 제시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따라서 비판적인 사고를 가지고 받아들여야 한다.
늘상 그렇듯 발표자들은 패키징 분야에서 지속가능성을 고려한 혁신의 성공사례들을 제시하면서 실제로 이런 활동이 가능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퓨마는 2010년부터 'Clever Little Bag'이라는 기존 종이신발상자를 개선해 종이 사용량과 물 사용량을 획기적으로 줄이고 있다고 한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A6tw8cwqSfo) 그 외에도 코카콜라는 2011년부터 생분해성 바이오플라스틱을 첨가한 PET 플라스틱병은 제조하고 있다. 케찹으로 유명한 헤인즈(Heinz) 역시 생분해성 소재를 활용하고 있다.
이처럼 수많은 기업들이 환경적 영향을 줄이고자 혁신을 하고 있지만, 이들 기업의 사례는 사회/환경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책을 모색하기 보다는 사회/환경적 영향을 줄이는 접근에 가깝다. 물론 그 자체로도 훌륭하고, 칭찬받을 만한 사례이다. 아마 저들 기업들은 외부 이해관계자들로부터 환경적 영향이 높다고 공격을 받았거나, 기업이 환경적으로 영향을 줄이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홍보하기 위한 목적이 컸을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기업'이라는 경제적 주체 영역에 남아 있으면서 대외적인 요구에 대응하는 전형적인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대부분의 기업들이 이러한 전략을 사용한다. 사회적 역할을 담당하는 조직으로 진화하는 도전을 하기 보다는 현재의 역할에 충실하면서 적어도 문제를 일으키지 말자는 생각이다.
이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가서 사회/환경 문제 자체를 해결하는 조직으로 진화하는 사례도 존재한다. ECOVATIVE design이라는 기업은 버섯균체를 활용한 스티로폼 대체 포장재, 구조재, 단열재를 만들고 있다. 기존 스티로폼은 석유화학제품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원유추출에서 부터 원유정제, 합성공정, 발포공정, 성형공정 등 다양한 공정이 필요하다. 그 과정에서 에너지 소비는 물론이고, 기능을 유지시키기 위해서 여러 화학물질 첨가제가 필요없게 된다. 또한 폐기단계시 스티로폼이 자연에서 완전히 분해되기까지 상당히 오랜기간이 걸리게 된다. 우리가 사용하는 제품들은 이처럼 자연친화적이지 않다. 우리는 자연에 상당한 부담을 주면서 편의를 누려온 셈이다. ECOVATIVE desgin의 버섯균을 활용한 새로운 소재는 자연에서 얻어진 그대로 이기 때문에 특별한 화학공정은 필요없고, 자연상태에서 폐기로 쉽다. 자원순환경제 관점에서 보면 그야말로 지속가능성을 추구한 혁신 사례가 아닐까 싶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DCjoiRa6aMQ)
지속가능성이 기업들에게 중요한 이슈로 떠오른 데에는 사회의 기대에 부합하면서 사업기회를 선점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가장 큰 이유는 시장의 룰을 만드는 정부의 규제가 강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나라 역시 2017년부터 자원순환사회전환촉진법(이하 자원순환법)을 시행할 예정이다. 자원순환법은 생산·유통·소비·폐기 등 모든 과정에서 폐기물의 발생을 억제하고, 발생된폐기물과 순환자원을 경제활동의 순환계로 되돌려 천연자원과 에너지의 사용을 최소화하는 사회를 지향하고 있다. 국제사회가 추구하는 지속가능한발전의 가장 기초적인 모습부터 규제를 통해 실현될 것으로 보인다. 올해 세계경제포럼(World Economic Forum)에서도 순환경제를 중요하게 다루었다. (*참고 https://www.weforum.org/global-challenges/projects/circular-economy/)
정부가 시장의 하드웨어 룰을 만든다면, 소비자들은 시장에서의 소프트 룰을 만드는 주체들이다. 이 소비자들도 자신이 소비하는 제품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사회/환경적으로 어떤 영향이 있는지, 내 몸에는 어떤 영향이 있는지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화여대 소비자학과 정순희 교수의 발표에 따르면, 우리나라 소비자들 사이에서도 사회적 소비 트렌드가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기존의 소비 트렌드가 개인의 만족과 일회적인 소비에 그쳤다면, 사회전체의 만족과 지속성까지도 고려한 소비 행태가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소비자들의 인식이 실제 소비결정으로 이어지지는 않는 상황이다. 아무리 환경과 지속가능성이 대세라고 떠들어도 소비자들은 제품의 가격과 성능, 디자인이라는 기본적인 요소를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지속가능발전을 위해 우리 사회가 나아가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 거대한 흐름 속에서 그렇다면 기업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까지 대부분의 기업들은 지속가능성 역시 하나의 일시적인 사회트렌드로 보고 홍보수단으로 활용하는 데에 그쳤다. 장기적으로 지속가능성을 추구하기 위한 역량 구축 및 사업 전략과의 통합보다는 일시적인 대외홍보, 규제대응에만 초점을 맞춰왔다. 이런 행동이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기업은 각자의 상황에 맞게, 각자가 판단한 우선순위에 따라 전략방향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아직까지는 기업에게 지속가능성이라는 이슈는 개별적으로 대응하면 되는 수준의 영향력을 가졌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앞으로 지속가능성 이슈가 기업 경영에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에 대한 질문이다. 지속가능성 이슈가 앞으로도 지속될지, 한순간에 유행처럼 사라질지에 대한 검증은 또 다른 얘기지만, 한순간의 이슈라면 지금처럼 대응하면 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우리나라 기업들은 지속가능성 이슈가 앞으로 커지는 시나리오에 대한 대비는 아직 부족한 상황이다. 이를 확인할 수 있는 게 국내기업들이 발간하는 지속가능보고서이다. 형식과 디자인은 잘 갖춰져 있지만, 내용을 차근차근 살펴보면 홍보브로셔에 지나지 않는다. 지속가능발전을 어떻게 인지하고 있고, 기업이 영위하고 있는 사업과는 어떤 관련이 있는지, 어떻게 사업전략에 지속가능성 이슈를 통합할지에 대한 고민은 미흡하다. 아니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지속가능경영은 기업의 문제를 인정하고
외부 이해관계자들과 함께할 때 비로소 출발점에 선 것이다.
지속가능성 이슈는 기업이 굳이 나서서 수행하지 않아도 된다. 기업은 그저 눈 앞에 사업기회들을 잘 살리면서 이윤을 창출하고, 규제에 대응할 수 있는 수준만 유지해도 괜찮다. 그러나 한 발 더 나아가 지속가능성을 기업 전략으로 내재화하고 싶다면 어디서 부터 시작해야 할까? 이번 컨퍼런스에서 발표한 그린마케팅의 그루인 제클리 오트만(J. Ottman) 대표는 지속가능성에서 가장 중요한 전략은 투명성이라고 지적한다. 투명성은 참 우리 기업들에게는 너무 힘든 단어다. 가장 눈에 들어오는 지배구조와 의사결정구조부터 투명하지 않다.
우리나라 기업들이 NGOs에 후원은 하고, 지역사회에 봉사활동을 하며, 소비자들에게 지속가능성을 표방한다고 광고는 한다. 그 덕에 우리 기업들이 Dow Jones Sustainable Index와 같이 전세계에서 지속가능한 기업으로 선정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은 기업과 외부이해관계자들 사이의 소통이 굉장히 일방적임을 의미한다. 기업들이 지속가능경영을 대외이미지 관리로만 바라보니 기업 내부에서 실질적인 사회/환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역량을 축적하는 데에 투자하지 못하고, 외부 이해관계자들에게 자신의 약점들 드러내려고 하지 않는다. 눈 가리고 아웅식의 장막을 쳐두고 있는 셈이다.
지속가능경영은 기업이 경제적 주체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 주체임을 자각하고 진화해나가는 과정이다. 진화의 핵심이 사회적 이해관계자들과 상호작용하면서 사회/환경 문제해결에 기여할 수 있도록 조직의 전략방향을 만들어 나가고, 조직의 역량을 축적해 나가는 것이다. 경제적 주체에 머물러 있는 기업은 NGOs가 자신에 대해서 특정 이슈로 비판할 때 이를 공격받는다고 인지하고 방어할 준비를 할 것이다. 법적인 선에서 최선을 다했다는 둥, 우리만 그러는 게 아니라는 둥, 사회에 기부금을 내겠다는 둥 이런 식의 변명이 나올 것이다. 반면에 사회적 주체로 진화해 나갈 준비가 된 기업들은 이런 상황에서 문제를 인정하고 앞으로는 관련된 이해관계자들과 논의를 거쳐 문제를 해결해 나가겠다는 대응을 할 것이다.
내가 지속가능경영을 시작하려는 기업의 CEO에게 조언을 한다면 "두려워하지 마라. 외부 이해관계자들이 당신의 기업을 해치려는 게 아니다. 더 나은 미래로 그저 함께 가고 싶을 뿐이다. 그들과 함께 할 때 비로소 지속가능경영의 출발점에 서게 된 것이다." 기업이라는 개념의 경계선이 허물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 기업들은 어떤 생각의 전환이 필요한지 앞으로 계속 고민을 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