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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녹차라떼샷추가 Nov 18. 2024

아이와 둘만의 여행이 필요한 이유

삶을 지탱해 나갈 태도를 물려줄 수 있는 시간


[들어가며]

아들과 둘만의 전주 여행,

서로에게 온전히 집중했던 시간



5살 아들과 전주로 여행을 다녀왔다.

육아휴직하고 떠난 두 번째 여행이었다.

3박 4일 동안 우리의 시간은 맞닿아 있었고

단 1초의 시간에도 허무함이 없었다.

마음이 가득 채워진 듯 만족스러웠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내가 느낀 행복의 이유를 되새겼다.

먼저 아들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고,

아들에게 더 넓은 세상을 소개해주기도 했다.

그리고 삶의 태도 역시 물려줄 수 있었다.


의외로 삶의 태도를 아들에게

물려줬다는 점에서 큰 만족을 느꼈다.

오래전부터 아들에게 재산 얼마보다는

삶을 지탱해 나갈 태도를 물려주고 싶었다.

살다 보니 돈이 부족해서 불행하기보다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몰라서 방황하는 일이

더 큰 괴로움이 된다고 믿어졌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아들과 둘이 떠난 여행은

내가 쌓아 온 자산*을 물려주기에 적합했다.

(*굳이 따지자면 무형 자산이 되겠다.)

우리는 아름다운 풍경 속을 거닐었고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고 대화했다.

전주에서 보낸 3박 4일 동안 그곳에는

아들과 나 둘만이 존재하는 세상이었다.


전주한옥마을 골목길




[여행 준비]

여행 장소 그 자체보다는

아들과의 교감에 더 집중



전주를 여행지로 정한 이유는 인사치레로

스쳐 지나간 지인의 말 덕분이었다.

가깝게 지내는 형이 전주로 내려가게 되면서

한 번 놀러 오라는 얘기를 꺼냈다.

아들과 다녀올 여행지를 고민하는 내내

'전주'라는 명칭은 내 신경을 자극했다.

귀에 가까이 대고 꽹과리를 치듯이

그 명칭은 시끄럽고 성가시게 굴었다.

결국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그 단어를 붙잡아

삶의 일부로 눌러 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전주행 기차표를 예매했다.


전주에서 여행 장소를 정할 때에는

평점이나 후기를 살펴보지 않았다.

여행은 개인적인 경험이기에

사람들이 같은 장소를 방문하더라도

인식마저 같을 수 없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아들과 나는 전주 지도를 펼쳐 놓고

함께 방문하고 싶은 장소를 하나씩 정했다.

우리가 선택한 장소에는 그곳에 가야만 하는

우리만의 목적과 이유가 있었다.


그렇지만 장소에 얽매이지 않으려 했다.

아들과 여행을 통해서 얻고 싶은 것은

아들과의 온전히 교감이었기 때문이다.

여행 장소는 그 교감을 도와주는 배경일뿐

그 자체로 여행의 목적이 될 순 없었다.


지도 보며 여행지 정하기



[여행의 행복 1]

나와는 다른 아들의 성향에

맞춰가는 방법 배우기



아들은 새로운 모험을 두려워하는 편이다.

대신 오랫동안 관찰하고 깊이 이해한다.

어려서부터 책을 읽거나 놀이를 할 때에도

같은 것을 반복해도 질려하지 않았다.

내 아들이지만 성향은 나와 정반대이다.

나는 새로움이 주는 자극을 쫓는다.

이미 해봤거나 쉽게 예상되는 일에는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편이다.

덕분에 다양한 경험을 갖게 되었지만

경험의 깊이는 얕다.


전주에서 아들과는 딱 한 번 싸웠다.

여행 첫날 저녁 식사 메뉴를 정하는데

서로 다른 성향이 부딪쳤다.

아들은 점심에 먹었던 석쇠불고기를

한번 더 먹으러 가자고 했다.

반면 나는 석쇠불고기는 점심에 먹었으니

콩나물국밥과 녹두전을 먹으러 가자고 했다.

웬만하면 아들의 요구를 받아줬을 테지만

아들한테 다양한 음식을 소개해 주고 싶었고,

무엇보다 같은 음식을 또 먹기는 정말 싫었다.

달빛이 환하게 내린 한옥마을 담벼락 옆에서

우리는 저녁 메뉴를 두고 옥신각신 했다.

결국 두 가지 조건을 내걸어 합의에 성공했다.

'국밥집에서 아들에게 식혜를 시켜준다.'

'그리고 콩나물국밥을 먹어보고 맛이 없으면

그 즉시 석쇠불고기를 먹으러 간다.'


아들한테 콩나물국밥을 먹을 때에는

숟가락으로 국밥을 먼저 뜬 다음에

김을 한 장 올려서 먹어보라고 알려줬다.

한 입 맛본 아들은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허겁지겁 국밥을 퍼먹기 시작했다.

더 이상 말해주지 않아도

국밥 위에 김 올려 먹는 걸 잊지 않았다.

내 몫으로 나온 김까지 뺏어갔다.

같이 나온 녹두전도 한 입 베어 물더니

그릇을 자기 쪽으로 가져갔다.

자기 혼자 다 먹겠다는 심보였다.

뒤늦게 옆 테이블에 앉은 젊은 커플은

꼬맹이가 콩나물국밥을 제대로 먹는다며

신기하게 쳐다보고 입맛을 다셨다.


국밥집을 나와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아들과 저녁 메뉴를 두고 싸웠던

그 담벼락 옆을 지나가고 있었다.

아들이 "아빠~"하며 나를 부르더니

"내일 아침에 콩나물국밥 또 먹자"라고 말했다.

아들의 "또 하고 싶다"라는 말은

그만큼 만족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새로운 모험을 좋아하는 내 성향과

같은 걸 반복하고 싶어 하는 아들 성향이

쉽사리 바뀌진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 둘이 여행하기에는

괜찮은 조합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다양하게 시도해 봤던 것들을

아들에게 엄선해서 소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비단 음식과 체험 활동뿐만 아니라

내 삶의 경험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콩나물국밥과 한옥마을 담벼락




[여행의 행복 2]

아들에게 놀이가 아닌

더 넓은 진짜 세상 소개하기



전주 여행에서의 마지막 체험 활동은

천년한지관에서 한지 만들기 체험이었다.

한지의 원료인 닥나무 껍질 벗기기부터

한지 원료를 체에 뜨고 말리는 전체 과정을

몸소 체험해 볼 수 있었다.

직접 만든 한지는 기념품으로 가져왔다.

아들은 서울로 올라오는 동안

한지가 구겨지면 안 된다며 신경을 썼다.

덕분에 한지를 가방 안에 넣지도 못하고

돌돌 말린 채로 손에 들고 다녀야 했다.


이곳을 여행의 마지막 장소로 정한 이유는

평소 아들의 관심 때문이었다.

아들은 집에서 수시로 종이를 만들었다.

목욕을 마치고 나면 혼자 화장실에 남아서

화장지로 종이 만드는 작업을 시작했다.

화장지를 세면대 물에 풀어놓고는

물감으로 색을 입히고 체 위로 올렸다.

그리고는 햇볕과 바람이 잘 드는

베란다 창가 앞에 고이 두고 왔다.

집에서 했던 과학실험 활동이었는데

몇 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반복하고 있다.

그런 관심을 가진 아들에게 놀이가 아닌

대로 된 종이 만들기를 보여주고 싶었다. 


여행을 마치고 엄마를 만난 아들은

가장 먼저 직접 만든 한지를 꺼내 보였다.

그리고는 체험하며 배운 내용들을

흥분에 목소리로 눈을 반짝거리며

엄마한테 설명하기 시작했다.

"한지는 닥나무로 만들어!!"부터

시작된 설명은 한참을 이어졌지만,

설명의 끝은 제 자리를 잘 찾아갔다.

"엄마한테 한지에다가 편지 써줄게"라며.


전주천년한지관 한지만들기 체험




[여행의 행복 3]

감동과 즐거움의 순간을

붙잡아두는 연습하기



이번에는 여행하면서 느낀 감각들을

조금 더 깊이 이해해보고 싶었다.

인간의 감각을 언어로 표현하기에는

한계가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다시 돌아오지 않은 순간의 감동을

단편이나마 내 안에 붙잡아두고 싶은

그런 욕심은 도저히 버릴 수가 없다.


여행 둘째 날에 전주동물원에 들렀다.

전주동물원에서 만난 여러 동물들 중

'토쿠원숭이' 관찰이 유독 재밌었다.

우리 안에는 약 20여 마리가 있었는데

아들과 나는 원숭이들의 행동을 보며

각자 "깔깔깔~" 대고 웃고 있었다.

아들이 웃는 이유가 궁금해서 물었다.

"뭐가 그렇게 재밌어?"

"원숭이들이 술래잡기하는데

서로 밀치다가 밧줄에서 떨어졌어! 하하하"

아들은 예상치 못한 상황이 생겨서

웃기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나도 아들한테 웃은 이유를 설명했다.

"아빠는 애기원숭이가 아빠원숭이 등에

올라타려고 낑낑대는 모습이 웃기더라?

너 같아서. 너도 맨날 아빠한테 올라타잖아!"

나는 원숭이한테서 아들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 점이 재미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1시간 동안 앉아서

토쿠원숭이를 관찰하며 대화를 나눴다.


우리는 '즐거웠다' '아름다웠다'라는

허무한 표현에 숨는 대신에

각자 순간에 느끼는 감각들에

조금씩 더 가까워지고자 했다.

나는 순간의 감동을 기억하는 방법을

30살 후반이 되어서 알게 되었지만

아들은 지금부터 이러한 방식에

익숙해질 수 있도록 돕고 싶었다.

어려서부터 쌓아 온 구체적인 감각들이

어려운 상황을 이겨낼 힘이 되어주기를

기대하는 아빠의 마음이었다.


전주동물원 원숭이 관찰




[여행의 행복 4]

스스로 한계에 부딪쳐도

다시 일어설 용기주기



아들은 벌써부터 완벽주의 성향을 보인다.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쓰다가도

잘못하거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으악!" 괴로워하며 종이를 던지곤 한다.

잘해보고 싶은 마음은 십분 이해를 하지만

강박관념 때문에 아무것도 시도하지 못하는

상황이 될까 봐 주의 깊게 살펴보는 중이다.


국립무형유산원에서는 상설전시를 본 후에

아들과 함께 전통 문양 그리기 체험을 했다.

구름, 해, 호랑이, 나비 등 10개 문양 중  

아들은 거북이 문양을 골랐는데

거북이 등껍질 부분에 육각형이 있었다. 


아들은 육각형을 몇 번 따라 그려보더니

마음대로 안 된다며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내게 대신 그려달라고 했지만 거절했다.

혼자 해낼 수 있는 기쁨을 빼앗고 싶지 않았고

한편으로는 잘 못 그려도 괜찮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아들은 이후 몇 번 더 육각형을 그렸지만

결국 울음을 터뜨리면서 펜을 집어던졌다.

"거 봐! 안 되잖아!"라면서 소리도 쳤다.


마침 국립무형유산원에서는 기획 전시

<국가무형유산 보유자작품전>가 열렸다.

속상해하는 아들을 안고 전시관에 들어갔다.

아들은 힘 없이 내 어깨로 고개를 떨궜다.

전시관에는 가구, 활, 그릇, 칼, 악기 등

장인들이 만든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을 만큼 완벽에 가까웠다.

천천히 전시관을 걸으며 아들에게 설명했다.

"여기 있는 작품들 되게 멋있지?

우리나라에서 제일 잘 만드는 선생님들도

 작품 만드려고 천 번도 넘게 시도했을 거야.

처음에는 잘 못하는 게 당연해.

그런데 열 번, 백 번 더 연습해 보면

육각형도 멋지게 그릴 수 있을 거야"


전시관을 나서서 숙소로 돌아가려는데

아들은 그림을 더 그려보겠다고 말했다.

다행히 내 말이 위안이 되었는지

마음을 다잡고 육각형을 몇 번 더 그렸다.

비록 아들은 끝까지 만족하지 못했지만

처음 그렸을 때보다 모양이 그럴듯했다.

아들이 스스로 능력의 한계를 마주할 때마다

오늘의 일을 떠올릴 수 있으면 좋겠다.

막막한 상황에서도 다시 용기 낼 수 있도록.


한국무형유산원 기획전시



[여행의 행복 5]

부모가 가르쳐야 할

기본적인 태도 물려주기



아들은 어른들에게 인사를 잘 안 한다.

아내도 나도 이 부분은 걱정이 된다.

수줍음이 많은 아이라 이해는 하지만

고마운 마음과 반가운 마음을 표현하는

인사는 기본적인 태도이기에

분명하게 가르쳐줄 필요가 있었다.


그런 이유로 이번에 전주 여행을 하면서

어딜 가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아들에게 인사 연습을 시켰다.

특히 방문한 장소에서 우리를 위해

안내와 설명을 해주신 분들에게는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라며

꾸벅 인사를 하도록 했다.

처음에는 아들이 쑥스러워하길래

조용한 곳에서 마음의 용기를 때까지

같이 손을 잡고 기다려주기도 했다.

안내해 주신 분이 잠깐 자리를 비우면

기다렸다가 인사를 같이 하기도 했다.

몇 번 하고나니 아들도 이제는

인사를 해야 한다는 걸 받아들인 눈치였다.

여행 셋째 날부터는 "감사합니다"

"안녕하세요" 외치는 목소리도 커졌다.


아들에게 물려주고 싶은 삶의 유산이

특별하고 거창한 것들은 아니었다.

'인사 잘하기'와 같은 태도만 잘 가르쳐도

부모로서 교육은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지식과 경험은 학교와 세상에서 배울 수 있지만

기본적인 삶의 태도들은

부모한테서 물려받아야 하는 것들도 있다.


한옥마을 우리놀이터 마루달에서 전통놀이 체험




[나오며]

부모들이 어린아이와

둘만의 여행을 떠나보길



다시는 없을 육아휴직 기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고민이 많았는데,

이번 여행을 다녀오고 확신이 들었다.

아들과 여행을 다니는 시간이

가장 가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었다.

여행지에서는 우당탕탕 좌충우돌스럽지만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의

그 만족감과 행복감을 이루 말할 수 없다.

휴직을 마치고도 아들과 둘만의 여행은

계속해서 이어나가려고 한다.


부모와 자식이 서로 멀어지는 시기를

우리는 '사춘기'라는 모호한 표현으로

정당화하고 있다.

사실은 부모도 자식도 바쁘다는 핑계로

서로를 온전히 마주하고 이해하는 시간을

잃어버린 결과라고 생각한다.

매일 집에서 얼굴을 본다고 해도

서로를 온전히 바라볼 여유가 없다면

금세 멀어지게 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한 번 멀어져 버린 정서적 간극은

시간이 지날수록 채우기 어렵다.


어린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에게

자식과 둘만의 여행을 추천하고 싶다.

가족이 함께 떠나는 여행도 좋지만

자식한테 온전히 집중할 수 있다는 점에서

둘이서 떠나는 여행은 또 다르다.

시간 흐르는 건 금방이다.


어느새 노을 진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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