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진우 Aug 15. 2018

어린 물범아. 엄마 어딨니?

세종기지에 나타난 남방코끼리물범

2012년 11월 27일. 세종기지에 많은 눈이 내렸다. 두번 째 세종기지 방문이고, 이후 3번을 더 방문했지만 이때만큼 많은 눈이 쌓인 적은 없었다. 건물들 사이로 키보다 높게 눈이 쌓여 있었고, 창고 건물 뒤편에는 눈의 터널이 만들어졌다. 밥을 먹으러 가는길도, 샤워장에 가는 길에도 땅을 밟을 일이 없었다. 눈 속의 세종기지다. 기지에 도착한 이틑날 저녁. 정비동으로 넘어가는 길에 낯선 물체가 길을 막고 있다. 크기는 1.5미터 남짓. 둥그런 몸매. 목과 몸통을 구분하기 어려운 살찐 체형. 남방코끼리물범이다.

2012년 11월 27일 세종기지. 기지에 많은 눈이 내렸다.
세종기지 창고가는길. 양쪽에 쌓인 눈이 마치 터널같다.

남방코끼리물범은 세종기지 주변에서 흔하게 관찰되는 물범이다. 세종기지 주변에서는 웨델물범, 남방코끼리물범, 표범물범, 게잡이물범, 남극물개 등 5종의 물범류(seal)를 볼 수 있는데 각 종마다 관찰되는 위치가 서로 다르다. 웨델물범은 눈이 쌓인 장소를 좋아한다. 세종기지는 남극의 여름인 12월이 되면 기온이 올라가고 눈이 녹는다. 이후 겨울이 올때까지 눈이 남아있는 곳은 한정적이다. 웨델물범은 이렇게 눈이 남아있는 장소에 가면 만날수 있다. 표범물범과 게잡이물범은 유빙을 좋아한다. 바다에 둥둥 떠다니는 유빙(물에 떠다니는 빙하)위에 누워 자고 있는 표범물범과 게잡이물범을 흔하게 볼 수 있다. 표범물범은 남극에서 가장 위험한 동물이기 때문에, 바닷속을 연구하는 잠수팀은 잠수전에 유빙들을 유심히 살펴 표범물범이 어디에 있는지를 확인하는 일이 필수이다.  남극물개는 보통 이동시기인 1월중순 이후부터 세종기지 주변의 해안가에서 관찰된다. 무리를 이루어 이동하기 때문에 여러마리가 동시에 관찰되는 경우가 많다. 해안가의 땅바닥에서 자는데 간혹 바위로 오인되기도 한다. 그래서 이 시기에 해안가 주변을 이동할 때는 앞을 잘 보고 다녀야한다. 앞발이 큰 남극물개는 몸통으로 이동하는 다른 물범류에 비해 육상에서 상대적으로 빠르기 때문이다. 남방코끼리물범은 해안가의 고운 모래나 해초가 많은 곳을 좋아한다. 간조시기에 고운 모래가 드러나는 곳 또는 해초들이 밀려와 쌓여있는 곳에서 여러마리가 무리지어 쉬고 있는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다. 남방코끼리물범은 몸이 워낙 커서 육상에서 높은 곳으로 올라오는 경우가 거의 없으며, 물이 빠진 곳에서 쉬다가 만조시기에는 물과 함께 사라졌다가 간조때만 나타나곤 했다. 세종기지가 위치한 바톤반도에는 남방코끼리물범의 번식지가 없지만, 인근 포터반도에 이 종의 번식집단인 하렘이 형성된다. 수컷한마리와 여러마리의 암컷으로 구성되는 하렘에서 번식을 한 이후 암컷들과 새끼들이 세종기지 주변까지도 이동한다. 새끼들은 암컷들의 무리에서 관찰되거나 간혹 홀로 해안가에서 자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근처에는 암컷 어미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

눈밭에 누워 자고있는 웨델물범
떠나니는 유빙위에서 자고있는 표범물범
유빙위의 게잡이물범
남극물개. 앞발이 다른 물범류에 비해 크다.
해초가 쌓인 해안가에 여러마리가 모여 쉬는 남방코끼리물범

이녀석은 태어난지 아직 1년이 안되보이는 녀석으로 어미에게서 독립하기에는 이른 시기로 보였다. 그런데 해안가도 아닌 기지내의 통로에서 떡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관찰된 통로에서 바다까지는 직선거리로도 50m가 넘고 기지 건물에 가려져있어 최소 200미터 넘게 그 몸으로 기어서 온 것이다. 그것도 철제 통로까지 어떻게 들어갔는지는 미스터리다. 통로를 막고 있는 녀석의 사진을 찍고 잠시 지켜보았다. 미동도 없이 누워있었지만 왠지 지쳐보였다. 정비동에 들어가려던 나는 건물을 돌아서 갈 수밖에 없었다. 잠시후 세종기지내에 안내방송이 나왔다. "지금 숙소동에서 정비동으로 넘어가는 통로에 코끼리물범이 있으니, 이동하실 분들은 건물을 돌아서 가 주시기 바랍니다". 저 통로를 이용하지 못할 경우 정비동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건물을 한바퀴 빙 돌아가야하는데, 그 거리가 꽤 멀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코끼리물범 새끼를 들어서 옮길수도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다음날 코끼리물범은 다른 장소로 이동했다. 하지만 기지내를 벗어나진 않고 본관동 건물 아래에 한동안 머물러 있었다. 굶고 있는 물범이 걱정이 되었던 월동대원들이 낚시로 잡은 바다물고기를 줘보기도 했던 모양인데, 먹지는 않았다고 한다. 얼른 바다로 나가 어미를 만나는게 최선인데, 어떤 이유인지 4일넘게 기지에 머물던 코끼리물범 새끼는 어느날 아침 사라졌다. 이후 나는 보지 못했지만 간혹 그녀석으로 보이는 개체가 기지주변 해안가에서 관찰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마도 근처에 어미가 있었던 모양이다. 다행이다.  

작가의 이전글 집나간 20번 펭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