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기록장 - 라디오 체조
나는 한때 우리 집 책장에 푹 빠진 적이 있다. 엄마와 아빠가 오래전에 읽었던 먼지가 가득한 책장 속 책들에게 꽂혔었다. 2000년대 초반에 출판된 경제서적부터 옛날 소설, 여행 에세이 등 다양했다. 그중에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멈추지 않고 읽었던 ‘공중그네’라는 책은 아직도 기억 속에 은은하게 남아있다. 그 책 속에는 ‘이라부’라는 정신과 의사가 나온다. 라디오 체조는 굳이 따지자면 이라부 이야기의 속편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사이에 ‘면장선거’라는 같은 이라부 시리즈의 책도 있다. 그냥 나에게는 공중그네가 더 기억에 오래 남아있을 뿐이다.) 이라부 시리즈의 책들은 나온 지 거의 20년이 다 되어 가기 때문에 새로운 책이 나왔다고 들었을 때는 오랜 과거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온 이라부를 만난 기분이었다. 그리고 난 당연하게도 그 기분에 홀려 책을 사서 읽게 되었다.
‘이라부’라는 정신과 의사가 있다. 환자의 입장에서 설명을 해주거나 치료하는 의사보다는 마치 호기심 가득한 어린아이 같다. 사람들은 자신이 심리적으로 뭔가 잘못되어 간다는 것을 느끼고 이라부가 있는 병원을 찾는다. 환자들은 엉뚱한 의사의 성격에 처음에는 실망을 하지만, 자신이 이 의사와 있으면 증상도 완화되고, 편해진다는 것을 느낀다. 그러면서 이라부는 자신의 욕심인 듯, 치료인 듯 핵심을 관통하는 장난 같은 해결책을 너무나도 가볍게 던져준다. 그리고 항상 그 말도 안 되는 해결책을 자신도 함께 신나서 실행한다. 보통 이런 것이다. 평생 일탈이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는 사람과 말도 안 되는 뉴스에 나올 법한 장난을 치거나, 주식으로 부자가 되어 돈은 많지만, 주식에만 집착하고 돈은 쓸 줄 모르는 사람과 매일 엄청난 돈을 쓰는 등의 환자의 증상과 맞부딪히는 소동들을 벌인다.
나는 사실 이라부의 해결책보다 태도가 더 마음에
와닿았다. 이라부는 천진난만한 어린아이 같기에 편견이라는 것이 없다. 그래서 건달이 환자로 와도 무서워하는 기색이 없고, 선입견 없이 호기심으로 다가갈 뿐이다. 따라서 환자는 이라부 앞에서는 자신의 직업이나 위치에 따른 책임이나 역할을 강요받지 않는다. 그걸 지켜보고 있을 때면 나 역시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낀다. 책을 읽을 때 아무런 부담도 느껴지지 않고 편하다.
이 책 속에서 기억에 남는 편을 고르자면 ‘라디오 체조’다. 여기에 나오는 주인공은 주변을 불편하게 하거나 잘못된 행동을 하는 사람을 보면 엄청난 분노를 느끼지만, 그 화를 낼 용기도 없기에 혼자 답답해하며 속으로 끙끙 앓는다. 사실 꽤 공감 가는 성격이다. 나 역시 갈등을 싫어하는 성향이 강해서 불필요한 갈등은 피하는 편이다. 다만 나는 그렇게 속에서 화가 나지 않기에 그 부분은 책 속의 인물과 다른 점인 것 같다. 이 주인공은 이라부와 몇 번의 상담 후에 사진을 찍느라 통행을 방해하는 사람들에게 말로 불만을 표출하는 대신 그 앞에서 냅다 라디오 체조를 한다(우리나라로 따지면 국민체조쯤 되지 않을까 싶다.) 그 체조를 본 사람들은 화를 내지만, 통하지 않자 결국 황당하여서 돌아가고 만다. 나는 이 주인공의 성격도 공감이 갔지만,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말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표현하는 것이 나름대로 쾌감이 있었다.
나는 이라부가 왜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서 갑자기 우리에게 돌아왔을까 계속 마음에 걸렸다. ‘라디오 체조’의 등장은 반가움과는 별개로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서 갑자기 등장한 속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을 읽고 난 후에 든 생각은 요즘 사람들이 전염병과 여러 갈등으로 마음이 지쳐 이라부가 다시 필요해진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