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20 칠레 푼타아레나스
공항에서 새벽을 보낸 후, 이른 아침 비행기를 타고 칠레의 최남단 도시 푼타아레나스에 내렸다. 애초의 계획은 푼타아레나스에서 곧장 푸에르토나탈레스(칠레)라는 도시로 가는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거였는데, 여기까지 오는 동안 볼리비아의 라파즈와 칠레의 산티아고를 건너뛰고 이동했기에 일정에 여유가 생겨 하룻밤 묵어가기로 했다. 칠레의 작열하는 태양 아래 있다가 12시간도 지나지 않아 남극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이번에는 추위에 몸을 떨어야 했다. 우리가 도착한 이른 아침 도심은 출근하는 사람들로 붐볐지만, 잿빛 구름이 덮여 왠지 모를 침울한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했다.
체크인 전에 도착한 우리는 가방만 숙소에 맡기고 아침을 먹으러 <Kiosk Rota Punta Arenas>라는 맛집에 갔다. 이곳에서 유명한 것은 빵 사이에 햄을 넣은 Choripan이라는 샌드위치인데, 출근 전 끼니를 해결하려는 사람들도 가게는 엄청 붐볐다. 우리도 식당 한편에 서서 초리판과 바나나 우유로 아침 식사를 했다. 갓 나와 따뜻한 빵과 달달하지만 미지근한 바나나 우유 그리고 사람들이 쉬지 않고 드나들어 열린 문으로 들어오는 찬 공기까지 묘하면서도 기분 좋은 삼박자를 이뤘다.
유심을 구매하고, 장(그래봤자 물이나 과자 따위)을 보고, 다음 날 이동할 푸에르토나탈레스행 버스 티켓까지 구매하니 붐비던 도심은 한산해졌고, 여전히 하늘은 흐려서 분위기가 더욱 가라앉았다. 점심으로 라면을 먹으러 <Akakiko Sushi>에 갔다. 한국인 사장이 계셨다. 사장님도 손님인 우리들도 서로가 한국인임에 놀랐다. 우리는 사장님이 한국분이실 줄 몰랐고, 사장님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느냐고 놀라워하셨다. "네? 저희 비행기 타고 왔는데요?" 수도인 산티아고만큼은 아니지만 푼타아레나스도 시위의 열기가 이어지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산티아고만 아니면 괜찮은 줄 알았다고 겸연쩍게 대답했다. 어쩐지 거리 건물 외벽이 불타있거나 아예 어떤 건물은 완전히 전소해 있기도 했고, 창문이 깨져있고 거리 곳곳에 휘갈겨 쓴 문장들이 널려 있었다. 시위 때문에 산티아고를 건너뛰고 왔으면서도, 그런 것들이 시위의 흔적이라고는 어리석게도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저녁에 퇴근하고 하교한 젊은이들이 시위에 가담할 수 있으니, 되도록이면 외출을 삼가라고 일러주셨다. 물리적 어떤 위험이 있어서가 아니라 공기 중에 희미한 최루가스 냄새가 날 수도 있으니 놀라지 말라고.
그리하여 우리는 식사 후 전망대(Mirdaro Cerro de la Cruz)만 둘러보고 바로 숙소로 복귀하기로 했다. 전날 공항에서 밤을 지새우며 잠 한숨 자지 않고 벌써 30시간 이상 깨어있는 중이었다. 여행에서 제시간에 규칙적으로 잔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긴 했지만, 우유니 투어를 소화하면서 생체 리듬이 완전히 틀어졌다. 숙소로 돌아와 긴장이 풀리며 잠도 쏟아졌다. 겉옷도 벗지 못한 채로 그대로 침대에 쓰러졌다. (진짜 기절에 가까웠다.) 그때가 오후 서너 시쯤이었다. 그리고 번쩍 눈을 떴는데 창 밖은 여전히 환하다. 시계를 보니 9시다.
다음 날 아침 9시까지 단 한 번도 깨지 이렇게 내리 잠을 잤다고? 도대체 얼마나 잔 거지? 친구들도 내가 얼마나 곤히 자고 있으면 깨우지 않은 걸까. 묘한 기분에 휩싸여 시계를 다시 보니 아침 9시가 아니라 저녁 9시다. 이게 무슨 일이지? 여전히 날이 이렇게 밝은데 지금이 저녁 9시라고? 살면서 가장 먼 극지방에 온 탓이었다. 11월의 푼타아레나스는 밤 10시가 지나서도 해가 지지 않았다. 집 앞 카페에 저녁으로 먹을 빵을 사러 가는데도 여전히 날이 밝았다. 헛웃음이 났다. 이렇게 무지한 상태에서 여행하고 있다니, 하루를 꼬박 잔 줄 알고 까무러치게 놀라 일어나는 모양새가 웃겼다.
여행하는 나라와 도시에 대해 너무 무지하고 준비 없이 여행하고 있는 게 아닌가 부끄럽기도 했다. 그러나 지나친 자책까지 할 필요 있었을까. 당연히 그 무지가 위험으로 이어지는 상황은 가능한 피해야 하지만, 대비하지 못한 추위에 눈물 나기도 하고, 저녁 10시에도 밝은 하늘을 보며 당황스럽기도 하고, 내가 살던 세상과 전혀 다른 환경에 놀라 신기해하기도 했다. 그 모든 것들을 신기하고 당혹스럽게 받아들였을 때, 그때의 감각들이 몸에 더 각인되지 않았을까 하고 핑계를 덧붙여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