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인 오늘 그리고 내일
35일간의 짧은 여행을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온 지도 세 달이 지났다. 벌써 여행은 마치 신기루처럼 기억 속에서 아스라해졌다. 최근 아르헨티나를 배경으로 하는 여행 예능이 방송 중이다. 내가 정말로 저곳에 갔던 걸까. 왜 화면 속 그곳은 더 화려하고 아름다워 보이는지. 내 여행보다도 남의 여행을 관찰하는 게 여전히 더 재밌는 신기한 현상.
남미 4개국을 여행하기에 역시나 35일은 짧았다. 여행에서 만난 (한국) 여행자들은 짧게는 3~4달, 길게는 1년 넘게 여행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 사람들에 비하면, 내 여행은 턱없이 짧아 참 바쁘고 고단했다. 여행에도 일요일이 필요하다는데, 날마다 월요일 같은 여행이었다. 2~3일에 한 번씩 이동해야 했고, 이동하는 날은 다른 일정은 소화하지 못하고 오로지 이동하는 데 시간을 써야 했다. 매일 투어 일정이 있었고, 새벽 3시에 기상해야 하는 날도 있었다.
장기여행이거나 여유롭게 여행하는 다른 여행자들에 비해 내 여행은 여행지를 깊숙이 들여다보기 어려웠을 거다. 그럼에도 내가 앞으로 쓰게 되는 글들이 자유여행과 패키지여행을 고민하는 사람이나 남미라는 곳이 주는 낯섦과 또 치안에 대한 우려 때문에 주저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작게라도) 도움이 되길 바란다. 물론 그저 보고 느낀 내 위주에 감상을 적게 되겠지만.
패키지여행보다 자유여행이 주는 이점은 특히 단기 여행자들에게 그리 크지 않은 거 같다. 그래도 자유여행을 추천하는 이유는 좀 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단돈 몇천 원 아끼기 위해 여러 투어사를 돌아다니는 수고스러움과 주문 하나 하는데도 번역기를 꺼내고 온 몸짓을 수반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현지인과 소통을 하게 하고 결국에는 여행을 더 풍부하게 해 준다. 다른 여행자들을 만날 기회도 물론 자유여행에서 더 많을 터다.
볼리비아에서 칠레 아타카마로 넘어가는 3일 투어 동안 인터넷이 되지 않았다. 서둘러 온라인 세계에 접속했을 때 가장 먼저 접한 소식은 동갑내기 여자 연예인의 자살 소식이었다. 얼마나 아프고 힘들었으면 스스로 생을 끝내야 했을까 감히 상상도 할 수도 없지만 나도 조금은 마음이 힘든 사람이라 그녀의 죽음에 가슴 덜컥 내려앉았다. 나는 공황장애, 불안장애로 매일 신경안정제와 항우울제를 먹으며 여행하고 있었다. 수면장애도 쉴 틈이 없는 이 여행에서 괴로움이었다.
나는 여행하는 동안 줄곧 스스로에 행복을 강요하고 있었다. '이렇게 멀리까지 와서 슬퍼하면 어떡해.', '이런 멋진 풍경 속에서 여전히 아파하면 어떡하냐고.' 감정을 주체할 수 없던 어느 날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울어버리기도 했다. 그저 담담하게 오늘이 있어서 다행이라며 감정을 추스르려 노력했다. 오늘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공중 도시이자 잊혔었던 도시 마추픽추를 볼 수 있었다고. 또 다른 오늘은 은하수와 별이 가득한 우유니의 사막 한가운데 서 누군가를 그리워할 수 있었다고. 또 다른 오늘은 아타카마 사막의 아름다운 노을을 보며 행복했다고. 그래서 참 다행이라고.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함과 동시에 애석하게 그래도 살아야 할 이유를 되새기는 잔인한 날이었다.
칠레의 아타카마로 넘어온 그날 밤, 나는 사막에서 별똥별을 봤다. 나를 포함한 내가 사랑하는 이들 모두 건강하게 해 달라고 소원을 빌었다. 그 어떤 거창하고 반짝이는 소원도 떠오르지 않았다. 돈을 많이 벌게 해 달라고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해 달라고도, 또 행복하게 해 달라고도 빌 수 없었다. 그저 건강하게 오늘을 살아가고 내일을 기대하게 해달라고 그렇게 빌었다.
오늘도 살아있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