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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jin Jan 21. 2024

세 번째 로그아웃

2024년 1월 19일_1700_2300

며칠 전에 우연히 알게 된 모루(철사에 털실을 감아 만든 끈) 인형 만들기 세트를 주문했다. 손재주는 영 없지만 그래도 손으로 사부작 사부작 하면서 시간 보내기 좋을 거 같아서, 전날 주문했는데 핸드폰을 끄기로 한 바로 당일 배송이 왔다. 오후 일찍 신사동에서 클라이밍 하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세 번째 로그아웃 시작!




2024년 1월 19일 금요일


1700-1750: 클라이밍 다녀온 차림 그대로 가방만 두고, 곧장 오피스텔 커뮤니티의 GYM으로 향했다. 이틀 연속 하체 운동을 해서 이번에는 등이랑 어깨 운동을 했는데, 클라이밍을 세 시간이나 하고 온 터라 낮은 중량으로 가볍게 했다. 클라이밍은 주로 당기는 운동이라, 체스 프레스나 숄더 프레스 같이 미는 동작의 근력 운동을 챙겨줘야 한다. 더불어 요즘 아랫배가 슬슬 나오기 시작해서 오랜만에 크런치(복근) 동작도 진행했다.


음악 없이 운동하는 게 처음에는 어색했는데, 커뮤니티 GYM에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조용한 편이고 센터에서 재생하는 음악도 잔잔하니 꽤 들을만했다. 앞으로도 운동하면서 영상 시청은 되도록 삼가야겠다. 짧은 시간에 빠르게 동작 수행할 있어 좋은 같다. 


LP Play List: Bob Dylan Band, Live Performance

1750-1910: 샤워, 화장실 청소, 재활용 분리배출, 청소기 돌리기


LP Play List: Lester Young 연주곡

1910-2030: 다이어리&일기 쓰기, 독서 최태성 <역사의 쓸모>

클라이밍, 근력 운동을 차례로 하고 따뜻한 물로 샤워하니 몸이 노곤노곤해지고 초저녁인데 벌써 잠이 쏟아진다. 평소 이 시간이라면 당연히 핸드폰 보면서 뒹굴뒹굴하고 있을 텐데, 핸드폰을 하지 못해서 졸린 건지, 평소에는 핸드폰을 했기 때문에 졸리지 않았던 건지. (같은 말인가?) 아무튼, 독서와 같은 순수한(?) 뇌활동은 그다지 자극적이지 않아 뇌를 깨우기에는 역부족인지 졸린 상태가 지속됐다. 


최태성 국사 선생님은 고등학교 시절 좋아했던 EBS 인강 선생님이었는데, 현재는 tvN에 <벌거벗은 한국사>를 진행하고 계신다. 말도 워낙 재미있게 잘하시지만, 한국사에 대한 애정과 학생들을 생각하는 진정한 마음이 느껴져서 인강으로 만났어도 참 스승이라는 생각이 드는 분이었다. 그런 까닭에 나도 한국사를 좋아하게 됐고(한국사 1급이다), 고등학교 때 아주 잠시나마 국사 선생님을 꿈꾼 적이 있다. 그러나 독립운동사에 들어서면서부터 암기할 게 많고 비슷한 단체도 엄청 많은 데다가 그 방향과 방식이 방대해서 좌절했다. 수능에서 독립 운동사 한 문제 정도는 틀려도 일등급 맞는데 문제가 없겠다 싶어서 포기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최태성 선생님은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독립운동 부분이 외울 것이 많아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많은 단체가 다양한 방법으로 독립운동을 펼쳤다는 건 그만큼 많은 사람이 치열하게 독립을 위해 싸웠다는 뜻이잖아요. 


이 문장을 읽으며 머쓱해졌다. 우리의 독립 역사가 단 몇 줄로 요약 정리할 수 없을 만큼 실로 방대했고, 다양했고, 치열했음을 오히려 감사하게 여겨야 했다. 최태성 선생님은 강의로도 글로도 깨달음을 주신다. 이 책은 인생의 과제에 대해서 생각해 볼 여러 주제를 제시하기에 그냥 덮기에는 아쉬웠다. 조만간 다시 펼쳐봐야겠다. 또 이 책은 말하듯이 기술되어 있는데, 선생님의 강의 말투 그대로여서 잘 읽혔고, 또 소개하는 일화의 인물들 중 상당수가 이미 <벌거벗은 한국사>를 통해 배운 적이 있기 때문에 더 쉽고 재밌게 읽혔다. (추천합니다.)


2030-2100: 앞서 밝혔듯이 모루로 인형 만들기에 도전... 하려고 했으나, 동봉된 설명서만 가지고 도저히 따라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정말 똥손이다. 손으로 하는 건 대부분 못 한다. 섣불리 창의성을 발휘하려고 도전했다가 그냥 재료만 버릴 거 같아 참기로 했다. 인형 만들기는 포기하고, 인형에 매달 구슬 목걸이를 꿰었다.


이후 유튜브 보면서 따라 만든 곰돌이(?) 모루 인형


2100-2200: 아무래도 졸려서 잠 깰 겸 호수 공원 산책

집 바로 앞에는 큰 호수 공원이 있다. 내가 무리하게 지금 살고 있는 집을 선택한 데에 8할의 영향을 미친 게 바로 이 호수 공원이다. 그래서 이사 온 지 얼마 안 됐을 때는 부지런히 산책을 했더랬다. 그런데 요즘은 춥다는 핑계 이런저런 이유로 산책을 잘 나가지 않는다. 2주 전 핸드폰을 처음 끄고 나갔던 눈 오던 날의 산책 이후로 오랜만에 공원에 갔다. 다행히 날씨가 춥지 않았고, 사람들도 많지 않아 조용하고 여유로운 시간이었다.


음악이 없어도 지루하지 않았다. 나는 말도 안 되는 상상하는 걸 좋아한다. 꽤 잘한다고 까지 생각한다. (그런데도 MBTI 테스트를 하면 N보다는 S성향이 다소 높게 나온다. 왜 나는 N이 아닌 거야..?) 나는 상상 속에 친구들이 8명 있는데, 나를 포함해 9명(그중 애인도 있음)이 전부 친구고 그 안에서 서로 다른 관계성과 히스토리를 가진다. 이 친구들과는 중학교 일 학년 때부터 친구였으니까 20년을 함께 했다. 상상 속 나는 지금의 내 모습이 아니라 허구의 인물이다. 그러니 스토리 전체가 상상력에 기반한 건데, 20년 넘게 스토리를 짜면서 이어가고 있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내가 머리가 좀 이상한 사람이 아닌가 싶지만, 괴로운 생각들로부터 힘들어하는 대신 대체할 만한 딴생각이 확장되다 보니 지금 여기까지 왔다.


보통 다른 사람들은 산책할 때 어떤 사색을 하는지 문득 궁금해진다. 주로 고민거리들을 생각하려나. 나는 일단 고민 자체를 싫어하고 있다고 해도 끝까지 미루다가 종국에 충동적으로 실행하는 편이라 시간을 내서 고민거리를 머릿속에 떠올리려 하지 않는 편이다. (나도 이게 문제라는 걸 안다.) 


그러다가 또다시 내가 핸드폰 없이 밖에 나와 있으니 문득 작년에 부모님과 했던 대화가 떠올랐다. 그날은 부모님의 결혼기념일이었고, 대화 주제는 부모님은 어떻게 연애를 했는가였다. 데이트할 때 주로 뭐 했는지. 현재와 비슷하게 카페 가고 영화 보고 밥 먹는 데이트였는지. 연락은 어떻게 하고 약속 장소에서는 어떻게 만났는지. 궁금한 게 많았다. 나의 부모님은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도 아닌데, 연애 얘기를 할 때면 부끄러워지는 건지 말수가 줄어든다. 그때(89년도에 만나 연애하시고 90년도에 결혼하셨다.)는 카페가 대중화되어 있지 않아 주로 다방에서 만났는데, 시골 여자인 엄마는 쌍화탕을 마시는데, 촌출신이면서 그래도 고등학교는 서울에서 나왔다고 그때부터 블랙커피만 마셨다는 아빠가 우스웠다는 얘기와 약속에 늦을 거 같으면 다방에 연락해 메모를 남겼다는 얘기를 겨우 들을 수 있었다. 다방 가는 거 말곤 뭐 했는데? 글쎄, 아빠 친구들이랑 다 같이 만나서 술 마셨나? (참고로 엄마는 술을 한 잔도 못한다.) 


그러면서 아빠는 문득 그 당시 일화가 떠올랐나 보다. 데이트 중에 광식(가명, 아빠 재수학원 동기 5명 중 한 명) 아저씨가 실연해 울면서 전화가 와 노량진 가서 같이 술을 마셨다는 이야기를 해주셨다. 데이트 중이었다면서 삐삐도 없었는데 어떻게 광식 아저씨 연락을 받을 수 있었어? 글쎄, 다방으로 연락이 왔나? 그렇다면 아빠가 그 다방에서 엄마랑 데이트할 걸 광식이 아저씨도 미리 알고 있었다는 얘기야? 그러게 어떻게 만났는지 기억이 안 나네. 술 한잔도 못하면서 남친의 친구가 울고 있다는 소식에 술자리에 따라가는 24살의 작고 어린 엄마를 생각해 본다. 짜증이 났지만 꾹 참고 따라갔을까 아니면 가서 진심 어린 위로를 해줬을까. 친구가 있을지도 모르는 다방에 울면서 전화를 거는 광식이 아저씨도 귀엽다. 26살의 어린 아빠는 데이트 중에 친구한테 가자는 말을 쭈뼛거리며 꺼냈을까? (현재도 부모님은 광식이 아저씨 부부와 친하게 지낸다.)


이런저런 상상을 하다 보니 어느새 공원 한 바퀴를 돌았다. 산책로는 딱 3킬로인데, 한 시간 내에 집까지 들어가려면 약간은 부지런히 걸어야 한다. 집에 거의 다다를 때쯤 스마트 밴드에서 목표 걸음 12000보에 도달했다는 알림이 울렸다.


2200-2300: 독서 무라카미 하루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2>

무라카미 하루키는 고등학교 2학년 때 <노르웨이의 숲>을 읽은 이후로 줄곧 가장 좋아하는 작가다. 그런데도 그의 다른 장편 소설은 많이 읽지 않았다. 올해는 하루키의 장편 소설 전부 읽기가 목표다. 초기 두 편 정도는 다소 난해하고 다듬어지지 않은 부분이 있었지만 역시나 하루키다워서 좋았고, 지금 읽고 있는 <세계의 끝...>은 내내 감탄하면서 읽고 있다. 그의 독특한 상상력과 과연 그럴듯하게 그려내는 글맛도 좋지만, 작가는 늙어가는데도 그 안에 영원히 늙지 않는 청춘들의 방황과 심연의 공허가 수 십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내게도 전해져 져 늘 전율한다. 하루키에 대해서라면 또 길게 주절주절 떠들 수도 있겠지만, 짧게 줄인다. 하루키 아저씨(아니 할아버지구나)는 찐이다.


끝.



이번 주 로그아웃은 마음이 확실히 편했다. 지난주에는 그 뒤에 일정이 있다 보니까 계속 시계를 들여다보게 되고 왠지 시간에 쫓기는 기분이었는데, 이번주는 시계도 거의 쳐다보지 않았다. 게다가 마지막 한 시간은 음악도 끄고, 단단한 정적 속에서 온전히 독서에만 집중할 수 있어 좋았다. 하나도 졸리지가 않았고, 머릿속이 오히려 개운해지는 느낌이었다. 이번주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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