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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jin Jan 26. 2024

네 번째 로그아웃

2024년 1월 26일_1100_1700

2024년 1월 26일


아침을 특별히 든든히 먹었다. 이틀 후 이사라 짐도 싸고 마지막 청소도 꼼꼼히 해야 했기 때문이다. 핸드폰은 껐지만, 오늘은 아무래도 노동요를 포기할 순 없을 거 같았다. 노트북을 끄는 대신 인터넷 공유기 전원을 끄고 랜선까지 뽑았다. 그리고 미리 유튜브에서 자주 듣던 플레이리스트를 오프라인에 저장해 플레이하기로 했다. 오늘은 이 정도는 유연하게 해도 되지 않을까. 블루투스 스피커에 연결 배경을 채워주고 자 이제 이삿짐을 싸 볼까!


1100-1300 설거지, 싱크대&인덕션&주방 타일 기름때 닦기, 주전자&토스트기 청소, 냉장고 청소 및 비우기, 주방용품 포장, 체크리스트 작성 등등


금일 체크리스트

부동산에 싱크대 물 샌다고 전달하기

청소기 필터 청소

토요일 체크리스트

분리수거함 당근 거래

옷 및 신발 포장

운동복 및 수건 세탁

일요일 체크리스트

박스테이프 구입

싱크대 하부장 닦기

화장실 마무리 청소

바닥 청소

커튼 걷기

월요일 체크리스트

음식물쓰레기 버리기

분리배출 완료

인터넷 장비 무인택배함 보관 및 문자 보내기

에프킬라 폐기

관리사무실 방문 관리비 정산 및 장기수선충당금 내역 확인

전세대출상환 완납 내역 제출


1300-1420 분리배출 및 분리수거함 청소, 우체국 택배 상자 구입 및 커피 테이크아웃


1420-1500 글쓰기, 노트북은 켠 김에 Word에 글을 써본다.

일요일에 이사를 한다. 아직 정식이사는 아니다. 현재 살고 있는 집의 임대 기간은 월요일이 종료인데, 이사 들어갈 집 입주 가능일은 2월 중순 이후라 3주 정도 집 없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일단은 부모님 댁이 차로 15분 거리라 잠시 머물기로 했다. (이사 갈 집도 이 동네다.) 그래서 지난 몇 주 간 주말마다 아빠차로 미리 짐을 보내고 있었는데, 이번 주 일요일은 용달 차량을 불러 침대와 소파를 옮기고 모든 짐을 뺄 예정이다.


며칠 전에 아침에 일어났는데 갑자기 생경한 기분이 들었다. 이 집에서 일어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낯설게 느껴졌다. 특별히 애정을 가진 공간은 아니었지만, 서른 넘어서 처음으로 가진 오로지 나만을 위한 내 공간이었다. 그런데 가만히 떠올려 보면 3년 전 이 집으로 이사를 온 시점부터 많은 게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첫 전세자금대출을 위해 회사에 재직증명서를 요청한 바로 그날 회사가 망해서 해고를 당했다. 해고를 당할 줄 알았다면 독립을 결심하지도 않았을 텐데, 참 인생이 공교롭게 흘러가는구나 그런 생각으로 이 집과 처음 마주했다. 해고와 끔찍했던 회사 생활을 이어 나가는 동안 몇 번이고 무너질 만한 상황을 겪어내면서도 나를 돌볼 가족은 이제 나뿐이라는 사실이 오히려 나를 단단하게 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럭저럭 혼자만의 라이프를 잘 꾸려간다고 생각했다. 물론 지나친 낙관이었다.


어쨌든 오랜 고통 끝에(?) 회사를 그만두고 아르헨티나로 훌쩍 떠났다가 한국으로 돌아와 꼬박 일 년을 방황하며 강제 집순이가 되었다. 하루 종일 집에 있다 보니, 8평짜리 원룸이 세상의 전부가 됐다. 어느 날 문득 너무 갑갑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식사는 식탁에 앉아서 제대로, 화장은 화장실에 문 앞에서 서성이지 않고 화장대에서 앉아서 하고 싶다는 소박하지만 간절한 마음에 이사를 결심하게 했다.


나는 이 집보다도 이 집이 위치한 생활권을 확실히 좋아하긴 했다. 집 앞 큰 호수공원은 말할 것도 없고, 아울렛과 백화점이 도보 3분, 스타벅스와 올리브영도 도보 3분, 은행과 모든 종류의 병원도 신호등 한 번 건너지 않고 갈 수 있다. 그뿐인가. 노티드 도넛 사러 슬리퍼 신고 갈 수 있는 노세권이다. 자정이 넘은 시각에 나가 호수 공원 산책을 해도 무섭지 않았다. 그러나 이 모든 생활을 누리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대출 이자 비용과 관리비는 무직의 내가 감당하기 너무나 버거웠다. (TMI 지난달 관리비는 최고치를 찍었다. 20만 원이었다.) 이 생활권을 포기하니 집은 두 배 이상 커졌는데도 전세금은 줄일 수 있었다. 부모님은 3년 동안 돈을 모아 더 좋은 여건으로 이사해야 하는데, (금액을) 더 줄여 가는 나를 보며 여전히 한심 반 걱정 반의 한숨을 쉬신다. 무직이다 보니 전세대금 대출도 어려워 직장 없는 설움이 뭔지도 겪었다. 아무튼 확실히 즐거운 이사는 아니다.


그래도 새로운 공간에서 새롭게 다시 시작하는 기대도 슬며시 해본다. 집 주변에 스타벅스는 없지만, 넉넉한 테이블을 두어 커피 마시면서 책 읽을 공간을 꾸밀 수 있게 됐다. 이제 호수 공원까지 걸어서 30분이 걸리지만, 그만큼 더 많이 걷고 더 건강(?)해 질 수도 있지. 또, 나를 유혹하던 노티드, 크리스피 도넛도 이젠 바로 사 먹을 수 없으니까 디저트를 줄이게 될지도 몰라. 게다가 주말에 아울렛과 백화점에 들어가는 줄 이은 차량들의 소음으로부터 해방된 고요한 주말을 갖게 될 거다. (사실 따져보면 부정적인 측면이 더 많아지지만… 굳이 그러지 말고) 긍정적인 면만 보자.


1500-1630 이삿짐 포장, 청소기 필터 청소


1630-1700 독서 무라카미 하루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2>

오늘은 여섯 시간보다 더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음악을 끄고 책을 읽으려고 하니까 너무 졸리다. 아쉽지만 30분 만에 독서 종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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