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9일_눈물 고개
2024년 5월 19일 일요일
1200 OFF 이번주 이야기
수면 장애를 겪고 있다. 잠에 드는 것도 힘들고, 일찍 잠자리에 들어도 꼭 새벽에 다시 깨서 한동안 뒤척이다가 결국 해가 뜨는 걸 확인하고서야 잠든다. 여러 방법으로 수면 패턴을 회복하려 해도 쉽지 않았다. 그러다가 새벽 세 시에 깬 어느 날, 별안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렇게 소리 내 울어 본 것도 무척 오랜만이다. 누군가가 곁에 있었으면 했다. 힘들다고 칭얼대고 싶었지만, 연락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혼자서 이 시기를 이겨내야 하는데, 혼자서는 도저히 답을 찾을 수 없을 거 같아 병원에 가기로 했다.
잠이 오지 않아 결국 밤을 새우고 아침 일찍 외출해야 했던 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병원에 들렀다. 그리고 4년 만에 다시 약을 처방받았다. 꼬박 서른 시간 가까이 깨어있었지만, 초저녁에 잠들었다가 또다시 새벽에 깨어날까 봐 안간힘을 다해 졸음을 참았고, 밤 10시가 되자마자 약을 복용하고 자리에 누웠다. 약을 먹었다고 곧바로 잠이 오는 것도 아니었다. 가슴에 뭐가 얹힌 것처럼 갑갑하고 심장은 무겁지만 더 빠르게 뛰는 것 같아 불편했다. 의사 선생님은 분명 깨지 않고 좀 더 오래 자는데 도움이 될 거라고 했는데, 약효가 없는 건지 또다시 새벽에 깼다. 그래도 밤 10시에 누워서 다음 날 아침 11시까지 꼬박 13시간을 침대에 누워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늦은 아침 겨우 일어나 메시지를 확인했는데, 친한 친구의 동생상 부고를 받았다. 마침 그날이 부처님 오신 날로 공휴일이라 부고를 받은 다른 친구와 함께 곧바로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장례식장으로 향하는 길에, 친구가 조심스럽게 임신한 사실을 밝혔다. 안정기에 접어들면 밝히려고 했는데, 이런 일로 일찍 만나게 될 줄 몰랐다고 했다. 누군가의 상실을 애도하러 가는 길에서 새 생명의 소식을 축하했다. 생이 삶과 죽음으로 이루어져 있는 게 당연한데도 늘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상주인 친구에겐 임신 사실을 나중에 이야기하려 했는데, 미처 감추지 못한 임산부 배지를 발견한 친구가 임신한 몸으로 이런 자리에 오는 게 괜찮은지 걱정하며 또 다 같이 부둥켜안고 울었다.
여전히 약을 복용하고 잠자리에 들면 가슴에 뭔가 얹힌 거처럼 불편감이 있었지만, 그래도 이전만큼 자고 일어나는 게 괴롭지는 않았다. 수면 패턴을 찾고, 기력도 회복하고, 다시 클라이밍도 시작하며 일상을 되찾아 가던 금요일 밤, 깜짝 놀랄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초등학교 동창인 친구인데 스무 살까지 한동네에서 친하게 지내다가 그 친구가 군대를 간 이후에는 뜨문뜨문 소식만 주고받았고, 그마저도 연락이 끊어진 지 십 년이 지난 친구였다. 정말 오랜만에 한 통화였는데, 예전 알던 그 목소리 그대로였다. 따져보니 스무 살 이후에 만난 적이 없었다. 이제 갓 스무 살이 되어 동네 놀이터에 앉아 맥주를 홀짝이던 때가 바로 엊그제 같은데 그 후로 14년이 흘렀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한참 통화하다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다는 걸 알게 됐고, 곧바로 친구가 택시 타고 우리 동네로 왔다.
대화는 14년의 공백이 무색할 만큼 편안했고 또 즐거웠다. 한참 얘기하다가 친구가 말했다. "나는 네가 엄청 반짝반짝한 삶을 살고 있을 줄 알았어. 아니, 빛나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는 게 아니라, 너는 그늘 없고 늘 밝고 행복한 줄 알았어." 내가 우리의 공백 14년의 시간을 단 몇 줄로 요약하고 난 직후 친구가 한 말이었다. 왜 우리 가족이 갑작스럽게 이사하게 되었는지, 대학 시절 장학금이 꼭 필요했던 사정과 회사생활을 견딜 수가 없어서 아르헨티나로 떠났던 이야기, 그리고 지금 내 상황을 아주 담백하게 말했더니 꽤나 놀란 눈치였다. 그간 친구가 본 나는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에 웃고 있는 모습이 전부였기에 막연하게 늘 빛나고 행복해 보였다고 했다. "힘들고 괴로운 모습을 프로필 사진으로 해 두는 사람이 어딨겠어. 게다가 힘들지 않은 삶도 없고." 가장 도수가 낮은 하이볼 한 잔을 주문했다. 약을 먹고 있어서 술을 마시지 못한다는 말을 이제 막 십사 년의 공백을 깨고 만난 친구에게 차마 털어놓을 수 없었다.
친구가 집에 바래다주는 길, 먼저 연락해 줘서 고마워라고 했더니, 친구가 "정말 친구가 필요했구나"라고 했다. 정말 그랬다. 이런 못난 내 상황을 온전히 보여줄 수 있는 친구가 없었다. 여전히 같은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는 자신이 너무 못나서 친구들에게 위로받기 창피했다. 그런 와중에 이 친구가 문득 내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서 연락을 했다고 한다. 사실은 훨씬 오래전부터 연락하고 싶었는데 용기가 없었다고도 했다. 이제라도 연락해서 다행이라고. 진심으로 고마웠다. 나를 기억해 주는 사람이, 나를 궁금해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있다는 건 내가 기대해 본 적 없는 종류의 감동이었다. 그 세월의 공백이 무색할 정도로 우리 사이에 어색함은 없었지만, 그 공백을 온전히 메울 순 없기에 우리는 다시 예전처럼 친구가 될 수 있을까.
1240 할머니 납골당에 가려고 나옴
어제가 할머니의 기일 2주기였다. 다행히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계셔서 버스를 타고 다녀올 계획으로 나섰다. 할머니가 계신 납골당에는 이미 자신보다 5년 먼저 세상을 떠난 둘째 아들(나에게는 큰 아버지)이 있었다. 할머니를 안치하는 날 당일 운 좋게 큰아버지가 계신 호실에 안치함 하나가 비어서 할머니를 그곳에 모실 수 있었다. 두 분이 같은 호실에 계시는 게 남은 가족들에게는 작은 위로가 되었다.
할머니를 안치하고 처음으로 다시 간 날, 납골당 입구에서 흰나비 한 마리가 마치 길을 안내해 주듯이 내 앞을 날았다. 이전 글에서 이미 쓴 적이 있는데 나는 큰아버지의 임종 소식을 듣고 새벽 어스름께 서둘러 집으로 귀가하는 길에, 수십 마리의 흰나비 떼가 나에게 달려들었던 신비한 경험을 했었다. 그때 그 나비가 꼭 큰 아버지 같았고, 나에게 흰나비는 큰아버지의 상징이 되었다. 그래서 마침 그날도 납골당 입구에서 흰나비를 마주쳐서 할머니한테 방금 오는 길에 큰아버지가 마중 오셨었는데 왜 할머니는 같이 안 왔어?라고 물으며 울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돌아가는 길에 흰나비를 마주쳤던 바로 그 자리에서 두 마리의 흰나비를 봤다. '할머니 내 말 듣고 배웅하러 왔구나, 큰아버지랑 같이 계시면 덜 외롭겠다.'하고 안도했다. 사실 그 길은 옆에 작은 동산을 끼고 있어서 심심치 않게 나비를 만날 수 있기에, 그 뒤로도 흰나비 찾기는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작은 루틴이 되었다.
1350 납골당 도착
날이 뜨겁다. 열심히 흰나비를 찾아봤지만 오늘은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1505 - 1615 헬스장
1645 집 도착, 야구 시청(KT가 3연패를 끊어서 다행이다.)
1725 샤워
1745 집안일(빨래 개기, 설거지, 청소기 돌리기)
1830 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