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행복을 응원합니다
언제부터 행복이 이리도 어려운 것이었을까? 밥 한 끼 배부르게 먹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하는 그런 소박한 하루에서 행복을 찾는 이들이 사라지고 있다. 평범한 하루에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을 행복으로 인정하지 않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왜일까? 감정은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이다. 슬픈 영화를 보고 누군가는 오열을 하지만 누군가는 눈물이 고이고 말고, 또 누군가는 전혀 슬프지 않았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행복도 그런 것이다. 어린아이들은 사탕 하나에 행복해지고 장난으로 한 말 한마디에 울음을 터뜨린다. 이렇게 주변의 작은 자극 하나로도 바뀔 수 있는 것이 감정이다. 어느 정도 성숙한 성인들은 어쩌면 이 점을 이용하여 감정을 컨트롤할 수도 있을 것이다. 행복하지 않더라도 일단 웃고 나면 진짜 행복이라는 감정이 느껴지는 것도 이와 연관되어있지 않을까?
우리는 생각보다 쉽게 행복해질 수 있다. 낙엽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문득 감성에 젖을 때, 까치 한 마리가 나무에 앉아있는 모습을 보고 말을 걸어 볼 때, 그럴 때마다 마음속에 피어나는 약간은 간지러운 그 감정을 자신이 스스로 행복이라고 정의하면 된다. 내 감정을 내가 정의하는데 감히 누가 뭐라고 할 수 있을까?
누군가는 그건 그냥 자기 합리화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저런 소박한 행복이 자기 합리화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묻고 싶다. 그럼 당신은 무엇이 진정한 행복이라고 생각하나요? 저런 일상에서의 과정적인 행복을 진정한 행복으로 보지 않는 이들은 대부분 결과적인 행복을 추구한다. 돈, 물질, 명예와 같은, 성취되면 그만인 결과들.
물론 그런 결과적인 행복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그것이 자신의 행복이라고 믿고 나에게 그렇다고 얘기한다면 제삼자인 나는 인정해야지 그들의 행복을 부정하면 안 된다. 남의 것을 부정한다면 나도 남들에게 나의 것을 부정당할 각오를 하고 해야 한다. 그냥 그들과 나는 행복을 보는 관점이 다른 것이다. 뭐가 더 옳고 그른가의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나는 그들도 가끔씩 일상에서의 ‘과정적이고’, ‘소박한’ 행복을 인지할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 그들이 어린 시절 이후로 잊었을 이런 방식의 행복도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다시 기억하게 하고 싶었고, 그것이 이 글의 존재 의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