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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대노 Feb 24. 2022

설거지하는 남편의 뒷모습은 오래 보지 않아도 예쁘다.2

수상한 외식

“설거지야, 청소야? 둘 중 하나 골라!”

“난 정리를 잘 못하겠어. 네가 설거지를 싫어하니까 내가 그걸 할게. 대신 그릇 정리는 좀 도와줘.”

극적 합의 체결!

“이제 그릇 쓸 때는 나한테 허락받도록 해. 내 허락 없이 불필요하게 사용한 그릇은 각자 알아서 설거지하기야.”

응? 뭐라고? 남편, 이건 좀 아니지 않니?     


말로는 ‘다 해줄게’라며 언제 해줄지를 정하지 않는 뺀질이 남편 탓에 해주기로 한 설거지를 내가 하는 날들이 늘어났다.

그런 날이면 꼭 한마디를 내뱉는 나.

“남편 너는 왜 옛날 가부장적인 남편들처럼 아무것도 안 해?”

내 말을 들은 친구 P가 말했다.

“그럼 너는 밖에 나가서 일도 안 하고, 사춘기 딸은 다 커서 너랑 놀아주지도 않아서 육아도 안 하는데, 왜 집안일도 안 하려고 해?”

나쁜 쉐ㄲ.              


      



남편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도 있겠다.

‘1식 1찬을 기본으로 하는 식사 준비에 세탁기, 건조기를 이용해서 그 대단한 빨래하는 일이랑 청소기나 미는 것 말고는 딱히 집안일이라고는 없어 보이는데, 지가 언제부터 집안일을 그렇게 했다고.’

주말에 하는 대청소는 남편 주도적으로 진행된다.

단독주택 살면서 그나마 불편함을 느끼는 쓰레기 분리수거도 응당 남편 몫이다.

개똥도 남편이 처리할 일이고, 음식물을 퇴비로 만드는 일도 남편이 담당자이다.

그러니 뭐 억울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우리 부부에게는 강제적이며 암묵적인 합의가 존재한다.


1.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딸아이의 탄생은 남편의 실수에 기인한다. (딸아, 발생론적인 의미의 실수란다. 엄마는 너를 사랑하고 또 사랑한단다.)

우리 집에서, 그 어렵다는 사춘기 딸과 함께 하는 시간이 가장 많은 사람은 바로 나다. (가족 구성원이라고는 남편과 나와 딸아이, 꼴랑 셋뿐이지만 어쨌든.)


2. 남편 돈으로 입양된 우리 집 반려견들은 내가 밥 주고, 내가 씻기고, 내가 산책시킨다. 워낙 개를 좋아하는 나 때문에 입양한 아이들이라고 해도 어쨌든, ‘남돈남산(남편 돈으로 남편이 산 아이들)’을 내가 케어하고 있다.


3. 우리 집은 남편 명의로 되어있지만, 하루 종일 내가 경비를 서며 지켜주고 있다.


4. 내가 남편 집에 선물(?)한 집 안팎의 식물들도 내가 물 주고  영양제도 주면서 대신 관리해주고 있다. 비록 남편이 원치 않은 선물이라도 네 집에 심었으니 네가 받은 거고, 받았으면 땡이다.


5. 결정적으로, 외식이 잦았던 우리 집은 코로나 때문에 내가 거의(?) 모든 끼니를 담당하고 있다.


남편은 예순이 넘으면 자연인처럼 혼자 살겠다고 했었다. 그땐 내가 식사 준비도 안 할 때라, 매 끼니를 남편이 뭐 먹을지 고민해야 하는 날들이었다. 내가 회사를 그만두고 집에 들어앉으면서, 그리고 코로나로 외식이 어려워지면서 대부분의 끼니를 만들어 먹기 시작했다. 그러자 남편은 예순이 넘어서도 나랑 같이 살 수 있겠다고 했다. 이유를 묻자 남편은 이렇게 말했다.

“예순이 넘어서도 네 끼니를 걱정하면서 살고 싶지 않았는데, 이제 네가 스스로의 끼니는 해결할 수 있게 되었으니 오래오래 같이 살아도 좋을 것 같아.”

 

남편이 집안일을 해야 하는 이유는 만들려면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으니, 남편은 내가 옛날 가부장을 운운할 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내가 우리 가족의 추억을 글로 쓰기 시작하면서 남편도 덩달아 추억을 강제 소환하게 되나 보다. 다시 떠오른 그때 생각에 몽글몽글해지기도 하는 날들이 늘었다.

브런치에 올린 우리의 추억을 읽고 남편이 또 몽글몽글해진 걸까.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점심시간에서 직장 근처 식당에서 먹은 순두부찌개가 맛있어서 내 생각이 났다고 했다.

순두부찌개를 사주겠다고 저녁에 데리러 갈 테니 시간 맞춰 준비하고 있으라고 했다.

내가 내 차 끌고 남편 직장으로 가면 좋겠지만, 남편에게 내 생각을 조금 더 할 기회(?)를 주고자 데리러 오라고 했다.

남편은 툴툴대면서도 나를 데리러 왔다.     


순두부찌개가 나왔다. 내가 좋아하는 라면 스프 맛의 완전 자극적인 그 맛.

고추기름으로 덮인 동동 계란을 탁 터뜨려 벌건 국물에 풀었다.

남편은 내가 좋아하는 걸 잘 아는 사람이다.

이걸 먹다가 내 생각이 났다는 남편이 그저 예쁘기만 했다.

순두부찌개를 한 술 뜨면서 사랑스러운 남편 얼굴을 보고 또 보았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불순한 생각.

“남편.  남편이 설거지 담당자가 되어서  자꾸 외식하자고 하는 거 아니지? 그냥 순수하게 내 생각이 난 거 맞지?”

남편이 웃는다.

그 웃음에 뭔가 다른 의미가 있는 것 같아 찝찝한 기분이 든다.

순두부찌개 맛이 달라졌다.


계란 동동 순두부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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