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이를 때린 이후, 이주가 지나도록 남편은 딸아이와 말을 하지 않는다.
나랑 점심을 먹으면서 딸아이 간식을 포장할 수 있는 곳만 고르면서도, 내가 가고 싶어 하는 식당 중 딸아이에게 줄 음식이 포장되지 않는 곳은 걸러가면서도 그렇게, 그렇게 지내고 있다.
여느 때처럼, 혼자 집에 있는 마누라 심심할까 봐 전화를 하면서도, 말끝마다 한숨을 달고 있다.
"왜 그렇게 세상 다 잃은 사람처럼 한숨이야!"
내가 뭐라 하면, 그냥 기운이 없단다. 난 왜 그러는지 알겠는데, 넌 모르냐?
"왜 사과를 안 하는 거야? 각자 자기 몫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게 그렇게 어려워?"
"각자의 인생을 살라며. 강요하지 마. 시간이 지나면 좋아지겠지."
"우리 딸은 우리가 물고 빨던 그 아기가 아니야. 우리의 돌봄이 필요한 성인으로 생각하라고 했잖아. 시간이 지날수록 화해는 점점 멀어지는 거야. 사과하는 게 왜 어려워? 잘못했으면 사과하는 거야. 지금 당신은 어른스럽지 못해!"
딸아이에게 물었다.
"아빠랑 계속 이렇게 지낼 거야? 너도 네가 잘못한 거 안다며, 근데 왜 사과는 안 해?"
"모르겠어. 아빠가 사과 안 하니까 나도 하고 싶지 않아."
"가족이 셋뿐인데, 이렇게 지내는 거 불편하지 않아? 아빠가 학교 데려다 줄 때도 둘이 말 안 해?"
"친구들이랑 톡 하거나 전화하면서 가. 친구들이 없었으면 불편했을 텐데, 친구들하고 얘기하다 보면 잊어버려."
딸과의 대화를 남편에게 전했다.
"거봐, 걔는 벌써 잊은 거야. 친구들하고 노느라 나랑 어떻게 지내든지 상관도 없는 거라고."
"여보, 당신 나이가 반백살이야. 당신은 상처받았는데, 딸아이는 친구들하고 노느라 잊었다고 맘 상해서 사과 안 하겠다는 거야?"
"몰라. 나한테 딸아이는 아직 내가 어깨에 태우고 다니고, 나한테 매달려 있던 그 아기라고! 배신감을 지울 수가 없어!"
"아기가 아닌데 아기 취급을 하니까 문제가 생기잖아. 나처럼 내려놔! 그저 우리의 돌봄이 필요한 성인 한 사람으로 대우하라고!"
"그게 잘 안되니까 그러잖아. 나한테 매달려 다니던 그 모습만 떠오른다고."
시간이 더 흐르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남편이야 다 큰 성인이지만, 딸아이는 아직 자라나는 아이인데, 이번 사건으로 평생 마음에 남을 상처가, 혹은 트라우마가 생길 수도 있는 문제였다.
그리고, 매 순간 땅이 꺼져라 한숨 쉬는 남편 꼴도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다시 딸아이와 남편을 식탁으로 불러 앉혔다.
"난 이해가 안 돼. 각자 자기 잘못을 인정해가면서 왜 서로에게 사과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대화가 시작됐다.
남편이 먼저 말했다.
"나는 부모의 역할을 자식이 잘못된 길을 갈 때, 올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인도하는 거라고 생각해. 그렇지만 지난번 내 행동은 훈육이 아니었어. 그건 사과할게. 앞으로는 절대 그런 일 없을 거야. 다만, 너도 한 가지는 명심해야 해. 말한 것처럼, 나는 네가 잘못된 행동을 하면 너에게 알려주려고 할 거야. 그런데 네가 그걸 받아들이지 않고, 눈빛이 달라지거나 무례한 행동을 한다면 다시는 너에게 그런 훈육을 하지 않겠어. 그리고 내가 훈육을 그만두겠다는 건, 앞으로 기본적인 생활 외의 일체의 지원도 하지 않겠다는 거야. 부모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아이는 학원도 다닐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아, 이게 아닌데...... 사과를 하고 화해하라 했지, 아이의 학원으로 으름장을 놓으라고 한 게 아닌데. 딸아이 얼굴이 굳어지는 것을 보며, 얼른 딸에게 물었다.
"딸아, 너는? 너는 사과할 거 없어?"
"내가 잘못한 거 알아. 엄마한테도 아빠한테도 사과할게. 그런데 나는 내가 억울한 일이 있어도 그냥 참아야만 하는 거야?"
남편이 끼어들었다.
"문제는 억울한 일이 있거나, 네가 잘못된 행동을 해서가 아니야. 그 이후에 잘못을 인정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을, 잘못을 인정하기는커녕 되려 네가 화를 내고 무례한 행동을 하기 때문에 일이 커지는 거 아니야? 넌 매번 그렇게 일을 키우잖아!"
이게 아닌데......
남편은 중2병이라는 말이 싫다고 했다. 그런 말로 사춘기 아이의 행동이 정당화되는 것만 같다고 했다. 나도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는데, 요즘 딸과 이런저런 일을 겪으면서 공부하다 보니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딸아이를 올려 보내고, 남편에게 말했다.
"살면서 당신한테 처음으로 실망했어. 우리랑 30년이나 세대차이가 나는 애야. 우리 때는 강산이 변하는데 10년이었지만, 지금은 5년도 안 걸리는 시대라고. 미디어의 발달은? 우리 때랑은 정보에 접근하는 속도 자체를 비교할 수가 없다고. 전문가들이 사춘기의 호르몬 변화, 감정 변화 등등을 판단해서 중2병이라 정의한 거지, 중2병이라는 명칭이 생겨서 애들이 변한 거야? 그렇게 답답해하면서 사춘기 아이들에 대한 공부 한번 해봤어? 아이의 마음을 먼저 보려고 한 적 있어? 잘못된 행동 이면의 아이 마음을 이해하려고 해 본 적 있느냐고? 아이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났어? 부모 때문에 살게 된 인생인데, 아이가 잘못된 행동을 한다고 부모가 포기하겠다는 협박을 해? 나도 사춘기를 겪었는데, 우리 엄마 아빠가 포기해주지 않아서 이만큼 살고 있구나, 난 포기하지 않은 부모가 있어서 다행이었구나 싶네. 그래서 난 우리 딸 절대 포기 안 해! 당신도 그딴 소리 다시는 하지 마!"
남편은 내 말에 답이 없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보여 남편을 혼자 두고 방으로 들어왔다.
한참 지나 남편이 방으로 들어왔다. 강제적으로 서로 사과를 한 것처럼, 강제적으로 대화의 물꼬를 터주어야 했다.
"오늘 오디션 보고 온 거 알지? 가서 잘 봤는지, 어땠는지 물어봐."
오올, 저 식탁의자를 생각하는 의자로 명해야겠다! 화두를 던져주고 생각할 시간을 주어서였을까, 남편이 순순히 이층 딸아이 방으로 올라갔다. 재잘재잘 소리가 들린다.
잠시 후 내려온 남편 얼굴을 보자, 무슨 대화를 했는지 물을 필요도 없었다.
이제 세상 다 잃은 것만 같던, 기운 없던 남편은 없다. 이제 들 부녀는 검도장에서 관장님조차 알아차릴 정도로 돈독해 보인다. 딸아이와 남편의 웃음 섞인 말소리에 절로 웃음이 난다.
그렇게 평화가 찾아왔다. 그런데 얼마 후......
내가 가끔 들고 다니는 조그마한 가방 뒷 주머니에서 4만 원이 나왔다. 이게 뭐지? 이게 뭔데 여기서 나오지?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지?
정황상으로는 그랬다. 핸드폰 하나 딸랑 들어가는 작은 가방이라 따로 지갑을 넣을 수 없으니, 주차비 등 현금이 필요한 상황에 당황하지 않으려고 비상금으로 챙겨둔 것이었는데, 이게 왜 그동안 아무리 짜내도 기억에 없다가 가방 뒷주머니에 손을 넣어 만 원짜리 넉장이 손에 닿자 기억에 난단 말이냐! 그동안 나는 아이한테 무슨 짓을 한 거지?
너무 당황한 나는 머릿속이 하얘지고, 숨이 잘 쉬어지지 않을 지경에 이르렀다. 내 기억에 대해 그토록 자만했는데, 그 자만심으로 아이에게 되돌릴 수 없는 상처를 주고 가정의 평화를 깼다는 사실이 너무 수치스러웠고, 나 자신에 대한 실망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우선, 남편에게 솔직하게 고백했다. 가만히 듣던 남편이 물었다.
"어떻게 할 거야?"
"아이한테 무릎 꿇고 빌어야지."
"당연히 그렇게 해야지."
남편이 상황을 그렇게 만든 나를 차라리 비난했더라면 덜 미안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남편은 그냥 그뿐이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제일 부끄럽고 힘들 거라는 걸 아는 남편은 내가 그 벌을 스스로 달게 받을 수 있도록 무거운 침묵으로 도왔다.
그리고 하교하는 아이를 차에 태우자마자 손을 잡고 말했다.
"딸, 나 고백할 거 있어. 네가 무척 화가 날 말이야."
"뭔데?"
"나, 돈 찾았어. 내가 무릎 꿇고 사과해도 모자라다는 거 알아. 너한테 얼마나 큰 상처를 준건지...... 내 기억력을 자만하고 널 의심했어. 널 믿지 못했던 거, 진심으로 사과할게. 진짜 미안해."
"거봐, 내가 나 아니랬잖아! 내가 문제집 안 풀고 풀었다는 뻥은 쳐도 도덕성 찔리는 거짓말은 안 한다고! 어디에서 찾았어?"
아, 넌 또 왜 쿨한 건데...... 차라리 화를 내라고! 너의 뻥과 거짓말의 차이는 잘 모르겠다만 아무튼,
이러쿵저러쿵 어떻게 된 건지 상황을 다시 설명하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이 돈은 내가 가지고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네가 받은 상처에 대한 보상이 될 수는 없겠지만, 이 돈은 네가 갖는 게 맞을 것 같아. 그리고 엄마가 못 믿어서 미안해. 사과하고 또 사과할게"
아이는 공돈이 생겼다며 활짝 웃었다.
"엄마, 그럼 나 학원 가기 전에 뭐 좀 사게 올리브 O 앞에 내려줘!"
신나서 돈 쓰러 뛰어가는 아이를 보며 나는 다시는 저 해맑은 아이를 의심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누구에게나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