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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이, 세상에서 제일 맘에 드는 아이로 만들기

1-5.          나의 아이, 세상에서 제일 맘에 드는 아이로 만들기


너는 세상에서 제일 맘에 드는 아이란다!”라는 말을 자주 아이에게 해 주세요. 이렇게 자신을 믿고 자랑스러워하는 부모가 있기 때문에 아이는 세상에서 제일 맘에 드는 사람으로 자랍니다. 

 

부모의 입장에서, 아이의 맘에 안 드는 행동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서 이런 말이 잘 안 나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 번 더 생각해 보세요. ‘부모도 맘에 안 드는 아이’가 어떻게 세상에서 인정을 받고 살 수 있을까요? 세상에 단 한 사람, 부모라도 나를 맘에 들어해 줘야겠죠. 마음에 안 드는 건 아이의 행동이지, 아이 자체는 아닙니다. 어떤 특정 행동이 맘에 안 들지만, 그런 행동은 자라면서 바뀔 수 있음을 아는 부모가 되어 보세요. 아이와 아이의 행동을 분리해서 생각하면 좋습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 아이가 마음에 안 들면, 더욱 이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다녀 보세요. 마치 주문이라도 외우 듯 자주 해 주세요. 남들이 뭐라고 해도 내 맘에 든다고 하는데 누가 뭐라고 할까요?  이렇게 믿어주는 부모가 있어, 아이는 제일 맘에 드는 사람으로 자라게 됩니다.  

광고에 나오는 예쁜 아기를 보면 세상에 사람만큼 아름다운 동물이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얼굴은, 엄마가 아이를 배속에서 9개월 키우는 동안, 아직 만나지 못한 내 아이의 모습이 됩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9개월이 지나 처음 만나게 된 아이는 상상 속 광고에서 본 예쁜 아가와 다른 모습입니다. 


전 첫 아이는 아들이기를  바랐습니다. 당시에는 아이 성별을 미리 알려 주는 것이 불법이었습니다. 저는 개구쟁이 남자아이가 늘 먼저 눈에 들어오고 훨씬 귀엽게 보여 아들을 꼭 키워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양수가 먼저 터져 24시간 안에 아이를 낳아야 하는 상황에서 걱정이 밀려왔습니다. ‘아들이 아니어서 내가 실망하면 어쩌나? 아이 얼굴이 맘에 안 들면 어쩌나?’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서 고통의 강도가 심해지니 다른 걱정이 밀려왔습니다. 그 당시에는 배에 기계를 달아 고통의 강도를 눈금으로 측정하는데, 간호사가 이 눈금을 확인하고 분만실로 보낼지를 결정했습니다. 난 고통이 심하다고 생각했지만, 간호사는 “눈금을 보세요. 아직도 멀었어요. 눈금이 7,8까지는 올라가야 하는데 2,3 밖에 아니잖아요” 하면서 고통이 아직 충분치 않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어떻게 이것보다 더 심한 고통이 있을까? 이러다 엄마도 안 돼 보고 죽으면 어쩌나?’ 하는 공포감도 밀려왔습니다. 자정쯤이 되어서야 분만 대기실에 들어갔는데 아침이 햇살이 창문으로 들어오는데도 이 눈금은 여전히 7-8까지 올라가지 않았습니다. 그때 상황에서‘아들 어쩌고, 얼굴 어쩌고’하는 건 사치이고 허영이었습니다. ‘하나님, 저 엄마가 한 번 되어 보고 죽게 해 주세요. 여기까지 왔는데 엄마 한 번 시켜 주세요.’라는 가절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아이가 드디어 태어났습니다. 엄마가 된 기쁨이 물씬 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죽을 고비라는 건 순전히 내 느낌 있었고, 고비가 지나가고 나니, 이왕이면 맘에 드는 얼굴의 아들이면 좋겠다 싶었습니다.  정신이 혼미하고 몸도 불편한 그 시간, 간호사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공주님입니다.” 그리고 핏덩어리 겨우 벗어난, 광고에서 보던 얼굴과 많이 다른 아이가 제 품에 안겨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첫 대면의 순간 믿기 어려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놀라운 기적입니다.  ‘세상에 이렇게 맘에 드는 아기가 있을까?’ 1%의 부족함이 없는 100% 맘에 드는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아들이 아니면? 얼굴이 맘에 안 들면 어쩌지 하는 마음 같은 건 애초에 없었던 듯, 완전히 세상이 바뀌어 있었습니다. 전 그 순간 ‘완벽한 아이’의 엄마가 되었습니다. 아이는 그 자체로 완벽하게 사랑스럽고 예뻤습니다. 사람들은”아기 참 예쁘다.”는 말 대신 “아빠 닮았네.”라는 말만 했습니다. 그리고 한참 후에 알았습니다. 아이가 예쁘지 않으면 사람들이 이렇게 말한다는 것을. 그 당시에는 사람들이 왜 이 예쁜 아이를 몰라볼까 그것이 이상했습니다. 


저 만이 아닐 것입니다. 부모의 눈에 나의 아이는 생명의 신비로움 그 자체입니다. 남들의 눈에 어떻게 보이든, 부모 눈에는 특별한 신비함이 있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가면서 이때의 느낌을 조금씩 잊게 됩니다. ‘초심을 잃는 다’는 말이 나올 만도 합니다. 처음에 느꼈던 100% 숫자가 점점 줄어들고, 처음의 신비한 생명에 대한 경이로움이 사라질 때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해답은 항상 찾을 수 있습니다. ‘초심을 잃었음을 인정하고, 초심을 회복하려는 노력’을 하면 됩니다. 내 아이의 장점, 특이한 점이 점점 안 보이고, 남의 아이의 것이 커 보일 때, 이때가 바로 초심으로 돌아가 내 아이의 특별한 점을 찾기로 다짐할 때입니다. 아이와 처음 만난 그 순간, 이런 귀한 생명이 내게 주어졌고, 이 생명으로 ‘부모’라는 대단한 타이틀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을 다시 상기하며, 아이의 생명력에 힘을 보태야 합니다. 그러면 아이가 달라 보입니다. 


저 역시 맘에 들었던 100% 수치가 떨어지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럴수록 더 있는 그대로 귀엽고 사랑스러운 점에 집중했습니다. 이건 상대의 좋은 점을 먼저 찾아내려는 노력을 늘 해왔기에 가능했습니다. 


연세대학교 한국어 학당에서 2000명이 넘는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며 깨달은 점이 있습니다. 각 교실에는 12명의 학생이 있었고,  언제나 먼저 눈에 띄는 학생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학생의 장점이 먼저 들어오면 나도 모르게 그들에게 더 눈길 주게 되곤 했습니다. 반면 태도가 불량하고 다루기 힘든 학생들은 마음으로도 결석하기를 바라기도 하고, 다른 반에 가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한 반에 한 명 정도는 눈에 거슬리는 학생이 있었는데, 이런 마음을 품으니 제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한 명에 대한 불편한 마음 때문에 전체 수업을 즐기지 못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 불편한 마음이 없이 수업을 하면 얼마나 좋을까’ 뭔가 해결책을 찾아야 했습니다. 저의 해결책은 ‘눈에 가시 같은 학생에게도 좋은 점이 있을 터이니, 무조건 이 좋은 점을 찾고 말로 해 주기’였습니다. 한 학기 10주 동안은 어떤 부정적인 마음도 품지 않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부정적 마음이 들면 10주 후로 미루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10주 동안, 모든 학생들의 장점에만 주목하며 보냈습니다. 과연 이 과정에서 무엇을 깨닫게 되었을까요? 


눈에 가시였던 학생이, 눈 부시게 특별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과장이 아닙니다. 좋은 점을 적극적으로 찾지 않았더라면 그 학생은 제게 계속 문제의 학생으로 남았을 것입니다. 학생의 대단한 면을 보지 못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억지로 숨기며 10주를 보냈을 걸 생각하면 가슴이 덜컹합니다. 관점을 조금 바꾼 것만으로도 얻은 것은 참 많았습니다. 그 학생들이 애제자가 되는 경우도 많았으니까요. 상대의 장점을 찾아보려 하면, 못 보았던 장점을 발견하고, 그걸 알고 인정하게 되니, 함께 있는 걸 즐기게 되어 관계가 좋아졌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나의 딸의 귀엽고 사랑스러운 점에 집중하니, 맘에 안 들었던 부분들은, 대단한 면에 가려져서 그 누구보다 맘에 드는 아이가 되었습니다.


엄마의 이런 좋은 마음을 늘 표현하고 지내다 보니 추억들도 많이 생겼습니다. 자주 가는 슈퍼마켓 옆에 책방이 하나 있었습니다. 유치원생이었을 때였는데, 딸은 책방에서 책을 골라 읽으라고 하고 저는 쇼핑을 하곤 했습니다. 물건을 다 산 후에 책방으로 들어가 딸을 찾으려면 구석구석을 잘 살펴야 했습니다. 책방이 크고, 아이들이 고개를 수그리고 책을 보기 때문에 딸을 찾는 일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때 전 ‘세상에서 제일 예쁜 아이가 어디 있지?’라고 중얼거리며 딸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딸을 찾아내면, 


“이렇게 아이들이 많은데 엄마가 널 어떻게 빨리 찾을 수 있는지 알아? 그냥 제일 예쁜 아이를 찾으면 꼭 너더라.”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딸은 겸연쩍어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엄마, 쉿! 그렇게 말하면 창피하니까 조금 작게 말하세요.”


“뭐 어때, 사실을 말하는 건데”


이런 식의 대화를 거의 매번 반복하며 슈퍼와 책방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아이를 근거 없이 칭찬해 주고 부추기면 공주병에 걸리고 자기만 아는 아이로 자란다고 우려부터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살면서 충분히 칭찬이나 격려를 받아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주로 이런 말을 하는 것 같습니다. 아이는 엄마의 평가만 받고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학교와 친구, 그들이 만나는 여러 사람으로부터 다양한 평가를 받고 자라면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갑니다. 그리고 나름의 균형을 찾아 자신을 파악합니다. 


어느 경우는 아이에 대해 잘 모르면서도 안 좋은 평을 대 놓고 하는 사람들도 만나게 됩니다. 남들이 잘 모르면서 무심코 하는 부정적인 말에 아이는 자신을 부정적으로 평가하게 되기도 합니다. 선생님을 잘못 만났거나, 삐뚤어진 친구들과 있다 보면 아이에게 쏟아지는 잘못된 평가를 아이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자신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게 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부모의 긍정적 평가, 무한한 인정이 기본자산처럼 필요합니다. 부모의 인정을 듬뿍 받고 자라면 다양한 평가 속에서 스스로를 비하하게 되는 상황에 부딪쳤을 때 난 우리 부모에게는 제일 맘에 드는 사람이야! 우리 부모만큼 나를 잘 아는 사람은 없거든. 나에 대해서 잘 모르고 하는 말 따위는 무시하고 난 나의 길을 가면 돼!’라는 내면의 소리를 듣고 벌떡 일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맘에 드는 나의 아이’라는 말을 자주 해 주세요. 제가 만난 많은 학생들이 부모들이 자기를 맘에 안 들어한다고 속상해했습니다. 언뜻 보기에 부모의 말에 대해 신경을 전혀 안 쓰고, 아무 생각이 없어 보이는 개구쟁이 아이들도 이야기를 나눠 보면 부모님에게 미안하고 죄책감을 느낀다고 합니다. 부모 맘에 안 드는 아이라서 미안하다고. 세상에 단 한 사람, 부모 만이라도 아이를 무조건 인정해 주고 맘에 들어하면 좋겠습니다. 


활동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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