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비의 12년 여러 모습이
1) “아~ 어~ 호오, 아~ 어~ 호오!” 상여 어르는 소리다. “어~호 ~어어 ~호 어이 가리 넘차 어~호 ~어어 ~호 어이 가리 넘차 ~어 ~호!” 상여 소리다. 꾸미지 아니하고 원초적으로 내뱉는 심중의 선율이다. “우리 동네 ○○○님이 별세하셨습니다. 발인은 ○○일 ○요일인데 장의 예식장은 ○○이라고 합니다. 내일 동네에 와서 살던 집에 들렀다가 장지로 향한다고 합니다.” 차분한 음성으로 이어지는 마을 이장의 안내 방송을 들은 다음 날 “어~호 ~어어 ~호”하는 소리가 반복해서 이어진다. 저기 아래 마을 끝자락 어디서 나는 소리다. 메아리처럼, 먼 북소리처럼 아련히 마음을 흔든다. 칠하던 페인트 붓을 놓고 가만히 듣는다. 맞다. 어제 마을 이장의 안내 방송이 있었지!
2) 유년 시절에 본 것과 들은 것, 그 보고 들은 것 중에서 여운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건 출상 전날의 상여 어르는 소리와 상여 나갈 때의 상여 소리와 그리고 상여 행렬이다. 그중에도 출상 전날 밤에 내는 상여 어르는 소리는, 달밤의 그 소리는 지금도 아련하다. 산기슭 여기 와서 상여 어르는 소리는 듣지 못했고 상여 소리는 두 번 들었다. 상여 소리와 애기 어르는 소리는 곡조의 꾸밈음이나 옥타브 차이를 빼고 본질적인 뼈대만을 비교한다면 사실상 같은 노래라고 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삶과 죽음에 대한 매우 중요한 성찰의 기회를 제공해 준다. 상여소리, 꾸미지 아니하고 원초적으로 내뱉는 심중의 선율!
3) 국화(菊花)가 피었다. 아니 핀 지가 언제인데 지금에 사 피었다고 내가 새삼 말하고 있는가. 그것도 볼 품 없이 맺은 꽃송이일 뿐 아니라 제대로 서지 못해 드러누워서도 비실거리는 초라한 것들을. 장미를 보면 “역시 꽃은 장미!”라는 생각을 하고 샐비어를 보면 “그래, 샐비어!”라는 생각을 한다. 국화 앞으로 갔다. 가위를 들고 갔다. 국화 앞에 서니 “꽃은 역시 국화지!”라는 생각이 더욱 강렬히 든다. 그렇다. 유년 시절의 우리 집 화단 꽃들은 칸나, 국화, 달리아, 분꽃, 나팔꽃, 카다리 여름 국화 아니던가. 그중에도 가을 끝자락 겨울 초입 서리 내릴 때의 국화 아니던가. 지금 산기슭 길뫼재 여기 드러누워 비실 거리는 이 국화가 유년의 내 정원 촌스런 그 국화와 조금은 닮았다. 가위로 몇 송이 정성스레 잘랐다.
4) 산국(山菊)은 거의 다 졌다. 그런데 무리와 떨어져 돌담의 햇빛 바른 곳에 따로 피어 있는 한 그루 여러 송이가 아직 노랗다. 가위로 두어 송이 잘랐다. 해국(海菊)은 피기 시작한다. 해국이 내 처소 여기서 가장 늦게 피는 꽃이다. 해국이 만개하면 계절은 겨울 가운데로 들어선다. 해국도 몇 송이 잘랐다.
5) 자른 국화 송이, 산국 송이, 해국 송이를 호비 묻을 구덩이에 놓았다. 호비를 묻었다. 흙을 반쯤 덮고는 꽃들을 또 놓았다. 호비 위에 흙을 다 덮었다. 그 위에 국화를 놓았다. 내가 한송이, 편이 한 송이 등 두 송이를 놓았다. 그리고 성호경 그은 후 Aqua Benedicta(聖水)를 뿌리고는 극락왕생을 빌었다. “다음 생(生)에서는 좋은 주인” 만나라고, 아니 “다음 생에서는 새로 태어나 자유롭게” 하늘을 날아다니라고, 아니 “좋은 집에서 좋은 사람”으로 태어나라고…. 그리고 사과했다. 더 잘 먹이지 못하고, 더 자주 목욕시켜 주지 못하고, 풀어놓아주지 못하고, 목에 난 혹을 치료해 주지 못한 것을…. 오늘 나는 골든 레트리버 호비를 묻었다. 호비는 편과 내가 산기슭 여기 인연 맺은 그 해에 와서 지금까지 함께 살다가 오늘 땅 속으로 갔다.
6) 국화, 아무 선입견 없이 국화 시(詩)를 머릿속에 그려본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고,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무서리가 내렸다. 모시 잎들이 화들짝 시들고 은행 잎들이 우수수 덜어지고 밤나무 잎들은 갑자기 노래졌다. 그저께 밤과 어젯밤에 잠을 설쳤는데 오늘 밤은 어떨는지 모르겠다. 호비의 12년 여러 모습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