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0608금
도착해서 보니 토마토 노란 꽃이 풍성히 피었고 열매도 제법 달렸으며 부푼 풍선처럼 제법 크다. 실과를 맺는 꽃을 보는 재미는 꽃을 보는 또 다른 재미다. 부산 집의 편에게 전화했다. 도착했다는 말 다음에 토마토와 고추가 주렁주렁 달려있는 상태를 바로 보고하였다. 편은 매일 아침 토마토 주스를 갈아 준다. 그 이전에도, 아니 처음부터 나는 토마토를 좋아했고 그 영향으로 우리 아이들도 잘 먹는다. 사 온 토마토를 볼 때나 이렇게 매달려 있는 풋토마토를 볼 때 똑같이 떠오르는 생각은 그 모양의 풍성함이다.
고추꽃은 흰색이다. 토마토 노란 꽃 옆에 있는 고추의 흰 꽃, 그 옛날 우리 집에서는 고추는 많이 심었도 토마토는 심지 않았다. 고추 농사에 대한 이미지는 죽을 고생으로 남아 있는지라, 편이 고추 모종 좀 심자고 했었을 때 난 심지 말자고 반대했었다. 편은, 다른 농사일 보다 고추 농사일이 유독 더 힘든 게 뭐 있느냐고 내게 물었을 때 듣고 보니 그 말도 맞는지라 고추 모종을 살 때 말리지 않았었다. 농막에서 혼자 먹는 아침밥, 풋고추 세 개를 따서 된장에 찍어 먹었으니 이리 맛있을 수가 없다.
앞을 바라보니 악양 들판은 이제 명경(明鏡)이다. 들판의 물 즉 논의 물은 지수(止水)이고. 보리는 다 베어지고 대신 물이 대어진 것이다. 명경지수, 이는 말 그대로 '밝은 거울'과 '정지된 물'을 의미한다. 상징으로서는 고요하고 깨끗한 마음을 말하고. 삶의 과정에서 마음의 평온과 깨끗함을 유지하는 것은 이 시점에서 내게 더욱 중요한 과제다. 어떤 상황에서도 고요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바로 '명경지수'라고 한다면, 60대를 바라보고 있는 나는 모내기를 위해 물이 대어진 저 계단식 논들을 보면서 ‘지수’ 같은 ‘명경’을 마음에 걸어야 할 때임을 문득 느낀다. 어릴 때 우린 부모님을 비롯한 어른들에게서 거울이라는 말보다는 명경이라는 말을 더 들으면서 자란 것 같다. 그땐 이사를 하거나 개업할 때 큰 거울 즉 명경을 걸어주는 것이 품새 나는 선물이었다. 그리고 그땐 명경이 지금처럼 흔하지도 않았다.
아직 모내기가 다 끝나지는 않았다. 이제 시작인 모양이다. 하지만 다음 주말에 오면 저 들판은 연두로 채워질 것이다. 그리고 그다음 주말에 오면 초록이 온통 들판을 점령하고 있을 것이고. 길, 인연 없던 길이 인연을 맺으니 내 길로 되다시피 한 저 길, 악양 들판 길이 내 앞에 열려 있다. 또 내 앞을 열어 준다.
도라지는 또 원도 한도 없이 쑥쑥 잘 큰다. 들어오는 입구를 도라지밭으로 만들었는데 이렇게 하기 잘했다고, 작전 성공이라고 생각하면서 혼자 웃는다. 도라지가 풀을 압도하니 그것만으로도 자기 역할을 다하는 셈이다. 그리고 꽃을 피우기 시작하면 꽃밭이 되는 것 아닌가. 도라지 꽃밭은 어쩌다 오르내리는 동네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해 줄 것이다. 토란잎이 꾸는 꿈은 둥근 꿈일까, 넓은 꿈일까. 신기하다. 내 손으로 토란을 심어 그 잎을 관조하게 되리라고는 일찍이 생각해보지 못했다. 난 처음엔 토란잎과 연잎을 구분하지 못했다. 상당히 오랫동안 혼돈하였다. 물론 어른이 되고 난 이후론 식별할 수 있었고, 식별하기 이전에 구태여 식별할 일이 없긴 없었다. 차라리 수련과 연의 식별이 애써 해야 할 일이었다. 악양 여기가 유달리 토란을 많이 심는 곳임을 안 것은 한참 후였다.
밤꽃이 풍성하다. 여긴 이제 한창이다. 밤나무는, 나무치고는 그리 친숙히 다가갈 요인을 가진 나무는 아니다. 어떤 나무보다 벌레의 몸통 공격을 많이 당했고 또 벌레를 잎으로 불러 모으는 나무였다. 유년 시절의 우리 과수원 밤나무들 그 잎들의 쐐기, 지금 생각해도 몸서리친다. 그땐 방제할 농약이 흔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밤나무는 단풍이 고운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래도 밤나무는 잊을 수 없다. 내 유년의 나무이기 때문이다. 밤나무와 감나무의 과수원 속 타작마당 그것은 내 유년의 마당이었다.
저녁상을 물린 후 밖으로 나오니 8시경인데도 덜 어둡다. 훤한 것은 아니지만 어둠은 아니다. 저녁기도를 바친 후 간단한 운동을 하는 중에 편에게서 문제 메시지가 왔다. 부산은 지금 천둥 번개 비로 난리가 났으며 20여 분 동안 정전사태도 빚어졌다고 했다. 그런데 여기는 거의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었다. 형제봉 위로 검은 구름이 걸쳐져 있긴 했다. 그러나 그것도 그리 크지 아니한 구름 선이었다. 들판을 보니 계단식 논들 즉 명경지수 위에도 어둠이 덮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