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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댄힐 Nov 12. 2016

나뭇잎이여,
바람이 그대를 유혹하거든

구르몽과 정의송의 낙엽

https://youtu.be/---Fk_GhAy8


①헤르만 헤세의 시를 한 수 먼저 읊는다. 그건 ‘낙엽’이다. "꽃마다 열매가 되려고 합니다. 아침은 저녁이 되려고 합니다. 변화하고 없어지는 것 외에는 영원한 것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토록 아름다운 여름까지도 가을이 되어 조락을 느끼려고 합니다. 나뭇잎이여, 바람이 그대를 유혹하거든 가만히 끈기 있게 매달려 있으십시오. 그대의 유희를 계속하고 거역하지 마십시오. 조용히 내버려 두십시오. 바람이 그대를 떨어뜨려서 집으로 불어가게 하십시오."


②이번엔 한시(漢詩)다. “돌아가던 개미는 구멍 찾기 어렵겠고(返蟻難尋穴:반의난심혈), 돌아오던 새는 둥지 찾기 쉽겠구나(歸禽易見巢 : 귀금이견소). 복도에 가득해도 스님은 싫어하지 않고(滿廊僧不厭 :만랑승불염), 하나만 보여도 속인은 많다고 싫어하네(一個俗嫌多 : 일개속혐다). 정곡(鄭谷)의 ‘낙엽’인데, 지은이는 스무 자 어디에도 낙엽과 관계되는 말은 조금도 비치지 않고 있지만, 낙엽이 쌓이는 형상을 염두에 두고 읽으면 그림이 명료하게 그려지는 시라고 한다. 직접 드러내놓고 말하지 않는 말의 묘미를 느낀다.


③길뫼재 우리 밭의 마지막 수확물을 거두었다. 서리를 맞아 하루 새벽에 새카맣게 폭삭 무너져 내린 줄기를 걷어내어 고구마를 캐고, 또 토란 줄기를 잘라내고 나니 밭이 텅텅 빈다. 비로소 11월을 실감한다. 물론 무, 배추, 시금치, 갓 등이 초록색을 띠고 밭에서 머물고 있다. 그래도 밭이 텅 비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3월 봄에 씨 뿌리는 것으로 시작된 경작 과정이 한 매듭 졌기 때문이다. 밭(들판)과 그릇, 채워져 있을 땐 풍요롭고 비워졌을 땐 허허롭다. 하지만 빈 밭과 빈 그릇이 상상력을 더 자극한다. 비어서 더 풍요로운 것이다. 그렇다면 털어내고 비우는 11월을 ‘상실의 달’이라고 볼 것만은 아니다. 비워야 채울 수 있는 것 아닌가. 헤세의 시어(詩語)대로, 꽃이 피더니 열매를 맺었고, 아침이 오더니 금방 저녁이 되었다. 여름, 올여름처럼 물러서지 않을 것처럼 기세등등하던 여름이 또 있었던가? 누가 뭐라 해도 가을, 만추를 표상하는 상징인 감을, 매달려 있던 몇 개 대봉감을 마저 땄다. 가을을 정식으로 마감시킨 것이다. 


④정의송이라는 가수를 알게 되었다. 모르고 있었는데 새삼 발견했다는 뜻이다. 삼척 초중고를 졸업한 정의송은 19세에 가수의 꿈을 안고 무작정 상경해 약 10년간 무명 가수로 밤업소를 전전했다고 한다. 그렇게 10년을 보내다 그가 작곡한 노래가 빅 히트를 쳤고 그 후로 지금까지 500여 편의 작품을 발표하면서 명실공히 자타가 인정하는 대한민국 성인가요 최고의 작곡가 중 한 명이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어릴 적 꿈이었던 노래에 대한 미련은 버리지 못하고 늦게 부른 노래 가운데 하나가 ‘낙엽’인데 이 노래를 내가 색소폰 후보로 찾아낸 것이다. 들어본 적이 없는 노래였다. 그는 트렌드에 편승하는 상업적인 노래보다 음악성이 있는 서정적이고 감성적인 노래를 부르겠다는 신념을 지켜가고 있다고 한다. ‘낙엽’은 대중성보다 음악성에 초점을 두고 만든 작품이라고 한다. 이 노래의 가사는 프랑스의 시인 구르몽의 ‘낙엽’이다. 시인이 되고자 했던 학창 시절 그는 하이네, 릴케, 예이츠 등의 시에 심취해 있었는데 구르몽의 ‘낙엽’은 그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할 정도로 감명을 줬다고 한다. 오늘날 작곡가이면서 작사가로 살아갈 수 있는 감성의 모태가 된 것이 바로 구르몽의 시 ‘낙엽’이었다는 것이다. 


⑤구르몽의 시 ‘낙엽’을 정의송의 안내에 따라 노래로 듣는다. 시렸던 사춘기, 아팠던 청춘을 아련하게 회상시켜주는 시다. 시리지 않은 사춘기를, 아프지 않은 청춘을 거쳐 오지 않은 사람 그 누가 있으랴만, 내 사춘기도 시렸고 내 청춘도 아팠었다. 시몬이 여자인 줄 그땐 몰랐고, 시몬이 남자인 줄 알던 그땐 구르몽이 여자 시인인 줄 알고 외었던 시다. 인제 보니 구르몽은 젊은 날 결핵의 일종인 낭창에 걸려 얼굴이 추해지자, 문밖출입을 하지 않고 고독한 생애를 보낸 시인이다. 비평과 미학에 커다란 공적을 남겼는데 ‘낙엽’은 대표적인 그의 상징시라고 한다.


시몬! 낙엽 잎새 저버린 숲으로 가자.

낙엽은 이끼와 돌과 오솔길을 덮고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낙엽 빛깔은 정답고 모양은 쓸쓸하다.

낙엽은 버림받고 땅위에 흩어져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해질 무렵 낙엽은 쓸쓸하다.

바람에 흩어지며 낙엽은 외친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발로 밟으면 낙엽은 영혼처럼 운다.

낙엽은 날개소리와 여자의 옷자락 소리를 낸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가까이 오라. 우리도 언젠가는 낙엽이리니.

가까이 오라. 밤이 오고 바람이 분다.



⑥나뭇잎, 아직 다 떨어지지 않았다. 산기슭 여기에서 보니 밤나무 잎이 떨어져야 다 떨어지는 게 된다. 떨어지는 모습이 뚜렷이 각인되는 것은 오동나무 잎이고, 밤나무 잎은 이제 색이 변하기 시작한다. 11월 하순 무렵 바람이 불면 밤나무 잎은 그야말로 우수수 떨어진다. 그리고 부는 바람에 장단 맞추어 우르르 몰려다닌다. 밤나무 잎이 떨어지면 떨어질 나뭇잎은 다 떨어지는 것이다. 그래도 헤르만 헤세의 시어에 어울리는 낙엽은 감나무 잎이다. “(감)나뭇잎이여, 바람이 그대를 유혹하거든 가만히 끈기 있게 매달려 있으라. 그대의 유희를 계속하고 거역하지 마시라. 조용히 내버려 두라. 바람이 그대를 떨어뜨려서 집으로 불어가게 하라." 구르는 소리나 밟히는 소리를 가장 크게 내는 것은 밤나무 앞과 참나무 잎인 것 같다. 시몬에게 밟히어 소리를 내는 낙엽은 이 나무들의 것 아닌지 모르겠다.


⑦색소폰을 함께 연습하는 지인 내외가 악양을 방문했다. 함께 평사리의 박경리 토지문학관 옆 한산사 전망대에 갔었다. 여기서 보는 평사리 들판과 섬진강 풍경이 좋다. 진주성을 걸었다. 섭이 성님 내외분이 안내에 따라 성안을 성벽을 따라 죽 걸었다. 사진도 찍어 주고 저녁밥도 사주었다. 남강 변의 진주성,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이라는 가사가 샹송으로 흐르는 ‘세월이 가면’의 박인환 시인이 또 이진섭 작곡가가, 성안의 어느 찻집 가로등 유리창 안에 앉아 있을 것 같은 진주성의 분위기를 느껴 보려 했는데, 성안에 그럴만한 찻집이 있지 않았다. 여러 해 전의 지리산 천왕봉에 오를 때의 낙엽, 그 낙엽도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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