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박

081109

by 로댄힐

숙진 암 바위 밭의 두 그루 고로쇠나무도 계절이 주는 색칠을 곱게 하였다. ‘만산홍엽’이니 우리 나무만 물감 칠한 게 아니지만, 저 나무가 내 나무로 되고 난 후 처음 보는 단풍이니 내 눈에 새롭게 띄는 것이다. 두 나무의 물든 모습이 서로 다르다. 빠르고 늦음의 차이인지, 서 있는 자리, 즉 지질의 차이 때문에 그런 것인지, 또 아니면 암수의 차이 때문에 그런 것인지 그건 모르겠다. 아무튼, 한 그루는 빨리 물들었고 다른 한 나무는 더디게 물들고 있다.


무성한 풀이나 옆의 나무들로 말미암아 한여름에는 덜 도드라지더니 풀들 말라 스러지고 잎들 대부분 떨어지고 나니 두 그루 고로쇠나무의 존재가 더욱 뚜렷하다.


하지만 앞에서 보는 평온하고 정적인 분위기와는 달리 뒤로 돌아가서 보면 사정이 달라진다. 평온하게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버티는 것이다. 더 큰 나무의 압박을 받는 것이다. 각각 한 그루씩 뒤에 붙어 서서는 아래 고로쇠나무를 누르고 있다. 뒤의 나무가 자연스럽게 저렇게 비스듬히 선 것이 아니라 사람이 그렇게 세워, 아래 나무를 압박하도록 계속 유도하는 것이다.


그 사정은 이렇다. 고로쇠나무가 서 있는 지점이 경계선인 모양이다. 간접으로 들은 원래 밭주인의 말에 의하면 바위 밭 경계선 안쪽으로 나무를 심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저 나무가 서 있는 지점은 바위 밭 끝부분이라는 것이다. 즉 자기 땅에 심은 나무라는 것이다.


저 나무 위 산자락은 어떤 문중의 땅인데 지금 염소를 기르는 분이 관리인으로 있다고 했다. 염소를 기르는 분이 (내 식대로 표현하면 염소 영감님), 경계를 넘어 심은 나무라고 생각하고는 고로쇠나무를 잘 자라지 못하게 하려고 바짝 붙여, 비스듬히 심고는 계속 압박하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바위 밭 구매 후 염소 영감님에게서 직접 들은 말이다. 자기가 그렇게 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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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소 영감님, 참 좋은 분이다. 만 3년 겪은 바로는 온순하고 선량한 분이다. 연세가 나보다 제법 위인데 늘 공손한 자세를 취한다. 그리고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일정한 시각에 지게를 지고 올라오고 내려가신다. 맞은편의 밤 숲, ‘염소 우리’에 저분이 계신 것을 생각하면 언어적 대화를 비록 나누지 않는다고 해도, 함께 하고 있다는 교감이 이루어지는 분이다.


그런 분인데 관리 책임을 진하게 느껴서일까. 저 나무에 관한 한 도를 조금 지나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고로쇠나무가 속한 부위 밭주인인 나로서는 그렇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경계측량을 하여 가릴 일도 아닌 것 같아, 저 나무들에 대한 나의 관심 표명 차원에서 철 지난 탁자와 의자를 그대로 두고 있다. 그럴 리가 없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저 나무를 베어버릴 생각을 하지 않으시도록 말이다. 저 언덕에 두 그루 소나무가 운치 있게 서 있던 것을 어느 날 베어버리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 소나무 외에도 다른 큰 나무들이 영감님의 손에 의해 계속 베어졌다.


적절한 제목을 찾는 데 고심하였다. 그렇게 해서 찾은 제목이 ‘압박’이다. 압박에는 ‘기운을 못 펴게 세력으로 내리누름’이라는 의미도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 고로쇠나무의 지금 상태를 잘 말해주는 개념이 된다.


우리 고로쇠나무는 지금 압박을 받고 있다. 베면 안 된다고 말하면 괜스러운 긴장을 유발할 것도 같아 철이 지난 탁자를 그대로 놓아두는 것으로 내 말을 대신하면서, 그 대신 길뫼재에 갈 때마다 고로쇠나무로 가서 잘 버티라고, 꿋꿋이 압박을 물리치라고 쓰다듬으면서 격려하기로 했다. 그렇게 기를 살려주고 또 나무와 교감을 이루기로 했다.


압박, “압박과 설움에서 해방된 민족”을 고래고래 고함으로 기념하던 초등학교 시절의 광복절을 먼저 떠올리는 개념이다. 지금은 우리의 고로쇠나무 처지를 말해주는 개념이고.


두 그루 고로쇠나무, 숙진 암과 서로 말벗이다. 또 동반자다. 서로는 서로에게 배경이고 멘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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