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장난 불장난

081018 산등성의 저물녘

by 로댄힐



말라비틀어진 밤나무 가지 너머로도 계절의 변화는 분명히 드러났다. 저기 형제봉, 또 그 오른편의 시루봉에도 단풍이 번져, 불길처럼 산을 휘감고 있다. 모닥불은 밑에서 위로 타오르지만, 가을의 불꽃은 위에서 아래로 타 내려오는 듯하다.


죽은 밤나무 가지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한 줄기 바람에도 흔들리지 못하는 메마른 가지는, 계절이 어깨너머에서 벌이는 불의 약탈을 느끼지 못한다. 만추의 쓸쓸함이 그 자리에 서려 있다.


가을 가뭄은 심하다. 바위투성이 밭의 매실나무에 물을 대려고 괭이로 두렁을 파다가, 곡괭이가 있어야겠다 싶었다. 땅이 굳어도 이리 굳을 수 있을까. 괭이를 곡괭이 삼아 돌 같은 흙을 겨우겨우 파냈다. 그렇게 매실나무 28그루의 발치에 둥근 고랑을 냈다.


40m짜리 호스 세 개를 이으니 120m. 컨테이너 농막 뒤 연못에서 밭까지 물을 끌어오려면 그만큼의 길이가 필요했다. 말로는 간단하지만, 실제로는 여간 수고로운 일이 아니었다.


호스 지름 15mm 구멍에서 콸콸 쏟아져 나오는 물. 참으로 귀한 물이다. 사시사철 수위를 잃지 않고 맑은 물을 간직한 우리 연못이야말로 길뫼재의 보물이다.


새벽달이 유난히 밝다. 네 시 반에 밖으로 나와 앉으니 어느덧 다섯 시, 그때부터 배추밭과 무밭에 물을 주고 나니 여섯 시가 되었다.


밤 숲 너머 염소 우리 쪽에서, 다섯 시 이십 분쯤 작은 불씨가 반짝이더니 이내 모닥불이 활활 타올랐다. 동네서 자기 집에서 오려면 제법 된비알을 걸어야 하는데, 이 어둠 속에 설마 염소 할아버지 말고 다른 이일까. 역시나 영감님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분은 불장난을, 나는 물장난을 한 셈이다. 서로 다른 짓을 했지만, 달빛 아래 몸을 놀린 건 마찬가지였다. 체조라면 체조, 허튼짓이라면 허튼짓. 하지만 그게 육갑은 아니었다.


해는 형제봉과 신선대 산등성이에 걸터앉아 숨을 고른다. 이제 곧 산 너머로 넘어갈 모양이다. 곧 달이 뜰 게다. 달빛이 부서지는 여기 길뫼재 언덕에 나와 서면 세상은 한없이 고요해진다. 소리조차 닿지 않는 밤의 적막 속에서, 달빛은 마치 오래된 기억처럼 내 마음 위에 내려앉는다. 그것은 찬란함이 아니라 차분함이고, 환희가 아니라 묵묵한 위로다.


밤바람은 소리 없이 스쳐 간다. 귀로는 들리지 않지만, 살결과 마음에는 분명히 와닿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흐름이야말로 가장 깊은 울림을 남긴다. 어쩌면 삶이 그렇다. 눈부시게 드러나는 순간보다, 흔적조차 미약한 스침 속에서 더 오래 남는 인연이 있다.


저기 아래 들판, 들길을 걷다 보면 홀로 핀 이름 모를 꽃이 있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지만, 바람과 햇빛 밤에는 또 달빛을 온전히 받아내며 그 자리에 서 있다. 그 꽃 앞에 서면, 나 또한 이름 없는 존재로서 살아가는 자신을 마주한다. 세상에 기록되지 않아도, 누군가의 눈길에 닿지 않아도, 그 자체로 피어 있는 것만으로 충분한 의미가 있음을 배운다.


해가 산등성이에 걸터앉는 저물녘, 빛과 어둠이 맞닿는 경계에서 나는 잠시 멈춘다. 하루의 끝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의 문턱이다. 산이 긴 호흡을 내쉬듯, 나도 한숨을 고르고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다.



이 모든 순간이 모여 삶을 이룬다. 달빛, 바람, 이름 모를 꽃, 해가 질 녘의 빛, 그 무엇도 소리 높여 자신을 드러내지 않지만, 조용히 마음에 스며들어 오래도록 잔향을 남긴다. 나는 오늘도 그 잔향을 안고, 다시 내일을 향해 걸어간다


가을꽃도 그렇다. 손을 잡고 함께 걸었던 게 언제였던가. 형제봉과 신선대의 저물녘은, 그저 아름답다. 눈물겹도록 아름답다.


물장난의 오늘 하루는 이렇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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