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를 연’로 확인하기도 한 100302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어제 호박 구덩이를 다 팠어야 오늘 오후에 마음 놓고 부산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 텐데. 그래서 아침부터 서둘렀다. 밭에 큰 돌이 많아 무리해서 곡괭이질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낑낑대며 일하고 있는데 면소재지의 K가 찾아왔다. 돌배나무와 모과나무 묘목을 캐러 자기 밭으로 가자고 한다. 함께 가서 6그루씩, 모두 12그루를 캐왔다. 그래서 호박 구덩이 외에 묘목용 구덩이 12개를 더 파야 했다. 파고 또 파서, 호박 구덩이는 그대로 두고 묘목을 모두 심었다.
부산 집에 있는 편에게 “K가 와서 이렇게 하자고 해서 저렇게 했다”라고 전했더니, 반응이 시큰둥하다.
“제법 큰 돌배나무가 네 그루나 있는데 뭣하러 여섯 그루를 더 심어요?”
“모과나무도 이미 한 그루면 떡 치고도 남을 텐데 왜 여섯 그루나 더?”
힐난조의 말에 괜히 시무룩해졌다.
저녁에 일찍 잠자리에 들었는데, 새벽에 어깻죽지가 쑤셔 깼다. 아마 내일은 더 아플 것이다. 지난겨울 매실나무 몇 그루를 옮기고 나서 왼쪽 팔꿈치 통증으로 병원을 다녔는데, 이번에는 왼쪽 어깨다. 그때도 곡괭이질이 원인이었는데, 이번도 다르지 않다.
“나뭇가지로 엮어 진흙 바른 작은 집,
벌들이 잉잉거리는 곳,
홍방울새 아득히 나르는 곳.”
예이츠의 ‘이니스프리의 호수 섬’에서 따온 구절이다.
이제 막 시작된 3월인데, 벌들이 나타났다. 여기저기서 잉잉거리는 소리가 난다. 가을 메밀밭처럼 밭 전체가 울릴 정도는 아니지만, 좀 후에 피게 될 벚꽃에 모여드는 것만큼 모여든 건 아니지만, 제법 여러 마리가 모여 합창을 벌인다.
꽃의 수는 많지 않은데도, 올해 매화 곁에서 들은 벌소리는 유난히 크다. 우리 매화나무가 이제 제법 자랐다는 뜻일 것이다. 작년보다 꽃도 많이 피었다. 벌들의 빠른 움직임에서 생기가 느껴진다.
꽃 한 송이에 벌이 두 마리 붙은 건 못 봤지만, 여럿이 흩어져 홀로 활동한다. 개미와는 다르다. 홀로 내는 소리가 모이니, 그것이 웅성거리는 합창이 된다.
이번 겨울 과감하게 가지치기를 해서 꽃송이가 달릴 가지 수가 적다. 그래서 우리 밭의 매화는 드문드문 피었다. 그러나 매화는 원래 고목의 두터운 가지에 몇 송이 달렸을 때 더 매화답다. 몇 해 봄을 지나며 이제 조금은 매화를 보는 눈이 생긴 듯하다.
결국 버티지 못하고 어제부터 우리 대학 근처 외과의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의사는 “무리를 해서 그렇다”는 당연한 진단과 함께 근육 이완제 주사와 물리치료를 권했다.
그는 또 말했다.
“연세도 있으시니 무리하지 마시고, 쉬어가면서 일하세요.”
‘연세’라는 말이 어쩐지 생소하게 들렸다. ‘나이’라면 익숙한데, 이제 60대 초반인 내 나이도 ‘연세’라 불릴 때가 된 것 같다.
그동안 몇 번 들은 적은 있었지만, 오늘은 유독 그 말이 귀에 남았다. 의사는 또 물었다.
“무슨 일 하시길래 곡괭이를 쓰세요?”
하동 악양에서 작은 차밭을 가꾸고 있는데, 나무 심을 구덩이를 파느라 그랬다고 대답해 주었다
그랬더니 그는 웃으며 말했다.
“재미있게 사시네요. 그래도 준비운동과 마무리 운동은 필수입니다. 연세도 있으시니 쉬어가면서 하세요.”
그러면서 “쉰다는 건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이라며 맨손 체조를 권했다. 일주일 정도 치료받아야 할 거라 하니, 내일도 강의 마치고 병원으로 서둘러 가야겠다.
3월이다. 일기는 다소 불순하지만 그래도 3월은 3월이다. 토요일, 경칩 무렵에 아내가 내려와 나물을 한껏 캐 갔다. 부산 집 식탁은 봄나물 향으로 가득하다.
‘나이’를 ‘연세’로 새삼 확인하게 된 3월, 이제는 곡괭이를 함부로 휘두를 나이가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그렇다고 곡괭이 없이 전원생활을 할 수도 없다. 다만 이제는 곡괭이를 신줏단지 다루듯 조심히 다뤄야 할 때가 되었음을 알게 된 3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