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에 대해 좀 다른 각도에서 사색 100402
물앵두나무를 구해 심겠다고 마음먹은 지 벌써 3년이 지났다. 앵두나무는 이미 사서 잘 자라고 있는데, 물앵두나무는 부탁했던 사람이 잊었는지 소식이 없었다. 그냥 그렇게 두 해가 흘렀다. 마을 이장에게 부탁해 볼까 하다가도, 편이 “그렇게까지 해서 구할 필요가 있겠느냐”라고 말하길래 망설였다. 그래도 물앵두 이야기를 먼저 꺼낸 사람이 편인지라, 어찌 됐든 구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때 문득 떠오른 사람이 있었다. 바로 앞 밭의 ‘염소 영감님’. 예전엔 염소를 키워 그렇게 불렀는데, 이제 염소는 없으니 이름만 남은 셈이다. 그래도 그 이름이 정겨워 여전히 ‘염소 영감님’이라 부른다.
금요일 어제, 저기 앞의 염소 우리가 있는 밭을 살폈지만, 영감님은 보이지 않았다. 동네 마을회관 앞을 지나며 그분 집 쪽을 봐도 인기척이 없었다. 그 집에는 큰 물앵두나무가 있다. 그래서 그 나무 아래에는 어린나무가 있을 것 같아, 있으면 한그루 줄 수 있겠느냐고 물어보려는 중이었다.
토요일 오늘, 하동 시외버스 터미널에 내린 편과 함께 마을회관을 지나는데, 저 앞에서 지게를 진 채 천천히 오르는 분이 보였다. 염소 영감님이었다. 물앵두 이야기를 꺼내니, 염소우리 곁에 있다고 하신다. 그 앞은 매일 지나다니며 꽃이 피는 나무들을 다 아는데, 내가 못 봤다고? 의아했지만, 막상 가서 보니 정말 있었다. 키가 훤히 큰 물앵두나무였다.
가서 보니 과연 있었다. 말로만 들었지 직접 눈으로 확인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동안 앵두는 그냥 앵두였지, 물앵두나 보리앵두로 나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큰 나무 곁의 작은 나무 하나를 주신다고 했는데, 내 눈엔 그 작은 나무도 꽤 컸다. 기대 이상이었다. 내가 직접 파겠다고 했지만, 영감님은 끝내 손수 파주시겠다고 했다.
그분은 양쪽이 뾰족한 곡괭이와 괭이, 톱을 연장 삼아 나무를 파내셨다. 곡괭이질은 이제 나에게 약간의 두려움을 준다. 어깨 통증의 기억 때문이다. 그런데 영감님은 곡괭이로 살살 흙을 풀어낸 다음, 톱으로 잔뿌리를 정리했다. “요령”이라는 게 바로 이런 것이었다. 나는 늘 힘으로만 파다가 몸을 상했는데, 그분은 흙의 결을 따라 나무를 다루었다. 그리고는, 잔뿌리를 소중히 다루고, 뿌리의 흙이 떨어지지 않게 하라며 당부했다.
그 순간 깨달았다. 진정한 농부는 나무뿐 아니라 흙과 뿌리까지 아낀다는 것을.
길뫼재로 가져와 자작나무 줄 아래에 심었다. 세 그루 중 하나는 뒤편 물가에, 두 그루는 앞줄에 심었다. 이제 앞마당에는 자작나무 세 그루, 라일락 두 그루, 물앵두 두 그루가 나란히 섰다. 그 위쪽에는 꽃댕강나무, 탱자나무, 돌배나무가 자리한다. 물론 차나무와 화초는 따로 두고.
그냥 ‘앵두’라 하면 흔히 ‘보리앵두’를 가리킨다. 크기 2미터 남짓한 작은 나무로, 4월에 꽃이 피고 5~6월경 열매가 익는다. 보리가 익을 때쯤 앵두가 익기 때문에 ‘보리앵두’라 부른다는 말도 있고, 열매가 작아 보리알처럼 생겼다는 뜻도 있다.
그렇다면 물앵두는 왜 ‘물’이 붙었을까? 물봉선이 물가에서 자라서 그런 이름이 붙은 것처럼, 물앵두도 물가에 자라는 나무일까? 찾아보니 그렇지 않았다. 물앵두는 앵두보다 키가 훨씬 크고, 벚나무처럼 자란다. 그리고 앵두보다 수분이 많다고 한다. 결국 ‘물앵두’의 ‘물’은 그 수분의 풍부함을 뜻하는 셈이다.
물앵두는 6~7월에 꽃이 피고, 9월쯤 열매가 익는다. 올해 옮겨 심었으니 열매는 내년쯤 볼 수 있겠다. 기다림이란 언제나 농사의 일부다.
‘물’이라 하면 문득 라틴어 성가 “Vidi aquam egredientem de templo, a latere dextro(나는 성전 오른편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보았다)”가 떠오른다. 이 물은 전례적으로 ‘생명의 물’을 상징한다. 이 물은 단순한 자연현상이 아니라, ‘생명과 회복, 그리고 순환’을 상징하는 성스러운 흐름이다.
‘Vidi aquam(물을 본다)’을 물앵두의 ‘물’과 연결하면, 자연과 인간, 신성과 생태가 만나는 철학적 장면이 펼쳐진다.
성전 오른편에서 흘러나오는 물은 단순한 상징이 아니다. 그것은 생명의 원천이며, 죽은 것을 다시 살리는 회복의 힘을 품은 물이다. 물은 흐르며 닿은 곳마다 새로운 숨을 불어넣는다.
나는 그 물을 물앵두의 물과 겹쳐 본다. 물앵두의 열매 속에도, 작은 성전의 샘처럼 생명의 수분이 맺혀 있다. 손끝으로 그 붉은 열매를 터뜨릴 때, 그 안의 물방울은 흙과 햇살, 벌과 바람이 빚어낸 ‘살아 있는 물’이다. 그것은 신성한 흐름의 한 방울이며, 땅 위의 또 다른 ‘성전의 물’이다.
물앵두의 물은 성전의 물처럼 순환한다. 비로 내리고, 뿌리로 스며들고, 잎맥을 타고 오르다 다시 열매로 맺힌다. 그 순환 속에서 인간은 단지 물을 소비하는 존재가 아니라, 물의 흐름 안에서 함께 호흡하는 존재가 된다.
생태철학은 이 순환의 자각에서 출발한다. 우리는 물앵두의 물을 통해, 물이 단지 식물의 생명 유지를 위한 물질이 아니라 ‘존재의 방식’ 임을 깨닫는다.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세계를 적시듯, 물앵두의 물 또한 이 땅의 모든 생명과 이어져 있다.
그 흐름을 보는 일, 바로 그것이 ‘Vidi aquam’ - 물의 존재를 본다는 뜻이다.
섬진강의 물, 악양천의 물, 평사리 개나리 아래 흐르던 그 물, 백령도의 물, 4대 강의 물 등등, 그 모든 물이 모여 다시 흙을 적시고, 물앵두의 물로 이어진다.
요 며칠 비가 많이 내려 우리 연못의 물도 콸콸 넘쳐흐른다. 그 탓인지 올챙이는 몇 마리 보이지 않는다. 떠내려간 듯하다. 아마 악양천으로, 더 아래로는 섬진강으로, 그보다 더 멀리 남해까지 흘러갔을 것이다.
그 흐름 속에서 나는 문득 생각한다. 물앵두의 ‘물’은 단지 수분이 많은 열매의 뜻만이 아니라, 그렇게 흘러가며 이어지는 생명의 물, 순환의 상징이 아닐까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