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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겹살 파티

탁자를 제작하고서 100521

by 로댄힐

부산, 이틀


이틀이 숨 가쁘게 흘러갔다. 20일 오전엔 강의실에서, 오후엔 회의실에서 보냈다. 저녁엔 오랜 인연을 이어온 ‘fiat’ 모임의 지인들과 식사 자리를 가졌다. 편과 나를 포함해 모두 11명.


모임이 끝나자마자 조문을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지하철역에서 내린 뒤 조문 장소를 찾느라 30분 넘게 헤매고, 돌아올 때도 같은 길을 반복했다.


밤 12시 반에야 집에 닿았다. 곧바로 구포역으로 향해 KTX에서 내리는 아이들을 맞이했다. 새벽 5시에 일어나야 했지만, 잠자리에 든 시각은 2시 반이었다. 5시에 일어나 채비를 하고, 6시에 악양 동매리를 향해 출발했다. 뜬눈으로 밤을 보낸 탓에 졸음이 걱정되었지만, 다행히 무사히 도착했다.


시멘트 둑


도착하자마자 컨테이너 뒤편으로 향했다. 지난 주말, 컨테이너 아래로 스며드는 물길을 막기 위해 시멘트 둑을 만들었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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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일은 아니었지만, 내 손으로 하는 일이라 일거리가 많았다. 먼저 땅을 고르고 나무판으로 거푸집을 세우고, 쇠막대를 박았다. 시멘트와 모래를 큰 고무통에 섞어 물을 부어 개고, 그 반죽을 거푸집 안에 고르게 부었다. 표면을 흙손으로 다듬고 거적으로 덮었다.


오늘, 내려와서 덮개를 걷으니, 제법 단단히 굳은 모습이었다. 작은 공사였지만 스스로 만든 흔적이라 뿌듯했다.


탁자 제작


‘녹음방초(綠陰芳草)’라더니, 숲은 짙고 풀은 무성했다. 길뫼재도 어느새 숲에 묻혔다. 입구의 자작나무 세 그루는 훌쩍 자라 위를 잘라주었다. 위로만 오르지 말고 옆으로도 퍼지라며, 가지를 다듬었다.


일체형 탁자를 막 완성했다. 두세 시간 걸린 작업이었다. 파라솔을 펼치고 바라보니, 연초록 녹음이 한층 짙다. 5월의 자작나무 숲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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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자는 묵직하고 튼튼했다. 여섯 명용으로 생각했지만, 여덟 명이 앉아도 넉넉했다. CAD 전공자인 H가 아니었다면 감히 시도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는 종이에 대충 스케치를 하더니, 머릿속 설계대로 오차 없이 탁자를 완성했다. 그 솜씨에 늘 감탄한다.


파라솔


사서 내려간 대형 파라솔을 펼쳤다. 그늘이 넉넉하다. 보기에도 좋고, 기능도 좋다. 여덟 명이 앉는 탁자를 모두 덮고도 남았다. 데크의 지붕, 파고라 역할도 톡톡히 해낸다. 파라솔 아래 앉아 바라보는 섬진강 평야는 탁 트였다. 눈과 비가 내릴 때, 또 봄과 여름, 가을과 겨울이 바뀔 때마다 이 자리에서 마주하게 될 풍경을 상상하니 전율이 일었다.


찻잎과 붓꽃


큰아이와 막내는 연휴를 함께 지내기 위해 특별히 시간을 내었다. 4월 하순에서 5월 지금까지 우리 가족은 더욱 바쁘게 지냈다. 둘째 아이의 대사(大事) 때 자기들도 언니 동생으로서 거들었고, 바로 얼마 전, 우리가 파주 헤이리에서 양가가 함께 하는 식사 자리에도 동행했고, 지금, 악양 동매행에도 기꺼이 따라나섰다.


맏이는 2018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통역으로 한몫했고, 막내는 강남의 투자회사에서 일한다. 벌레를 유난히 무서워하던 아이들이 초여름의 들판에 나서 주니 대견했다. 함께 하지 못하는 둘째는 자기 반려자와 더불어 그쪽 부모님 모시고 외할머니께 인사드리러 천안 옆의 임장이라는 곳으로 향하는 길 나섰다고 문자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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맏이는 찻잎을 따고, 막내 이모는 붓꽃을 골랐다. 편은 삼겹살 파티를 위해 상추와 열매채소를 다듬었다. 나는 옥수수 이랑을 매고, 땅콩 고랑을 정리했다. 새로 돋은 돼지감자 순과 성냥 알보다 커진 사과 알도 확인했다. 그때 맏이의 경고가 큰 소리로 내게 던져졌다.


“아빠, 일 그리 많이 하면 안 된다고 캣제!”


잠시 멈칫했지만, 곧 다시 손이 움직였다. 여기 오면, 일 안 하고는 견딜 수가 없다. 그동안 H 즉 막내 이모부는 데크 작업을 마저 하고 있었다. 막내는 파라솔 아래 앉아 섬진강 평야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삼겹살 파티


어둠이 내려앉고, 저녁이 깊었다. 그러나 봄밤은 길다. 형제봉 너머로 해가 져도 완전한 어둠은 아니었다.


이제 삼겹살 파티의 시간이다. 아이들이 서울에서 와인과 잔을 챙겨 왔다. 일곱 명이 둘러앉아도 한 자리가 남을 만큼 탁자는 넓었다. 바람도 없고, 춥지도 덥지도 않았다. 벌레도 날지 않았다. 가든파티에 이보다 좋은 날이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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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겹살 굽는 냄새와 와인의 향이 어우러지고, 웃음과 이야기 소리가 밤공기를 채웠다. 심은 잔디가 자라 밭을 이룰 무렵엔 진짜 가든파티를 열 수 있을 것이다.


언덕의 붓꽃은 이미 절반 이상을 덮었고, 빈자리엔 새 꽃을 채워 심을 생각이다. 자작나무도 내년엔 한층 더 무성해질 것이다. 그날 밤, 우리의 이야기는 와인이 다할 때까지 이어졌다.


부산으로 돌아오는 심야의 고속도로는 한산했다. 창밖의 불빛이 하나둘 스쳤다. 길 위의 고요함 속에서, 하루의 여운이 오래도록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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