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와 공굴 일, 그리고 명멸등 100718
불이 켜졌다 꺼졌다 한다. 모랭이 포구나무 아래 붉은 네온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금세 다시 살아난다. 멀리서 보면 어둠 속에서 작은 생명이 숨 쉬듯 명멸한다. 단순한 불빛이지만, 이상하게 눈을 끈다. 오늘 하루도 깜박이는 저 불처럼 흔들리다 지나가겠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스친다.
‘길뫼재 프로젝트’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사흘 동안 마무리하기로 한 일들은—원두막 옆 빨래터에 공굴 작업을 하고, 창고의 깨진 벽과 새는 지붕을 고치고, 범이와 호비 집의 지붕 갑바를 갈아주는 일—하나같이 손이 많이 간다. 이곳에서 풀을 뽑고 나무를 손질하고 예취기를 돌리는 일은 기본이지만, 나에게는 그 기본조차 결코 가볍지 않다.
창고 지붕은 내 힘으로 할 수 있어 보이지 않아 토요일에 편과 그 일을 맡을 H가 함께 내려오기로 했다. 그런데 도착해 보니 범이·호비 집 앞에 없던 것이 쌓여 있다. 가까이 가보니 소똥 거름이었다. 꽤 많은 양이었다. K에게 문의하니 1톤 트럭으로 부려놓고 갔다고 한다. 퇴비장으로 옮겨야 했다. 계획에 없던, 그러나 피할 수 없는 일.
옷을 갈아입고 포크를 들었다. 젖은 거름을 옮기는 일은 말 그대로 ‘힘으로 하는’ 일이었다. 예전에 장마철 닭똥 거름을 옮기던 기억이 스쳤다. 온종일 해도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편에게 전화를 걸자 돌아온 말은 이랬다.
“이 폭염에 무슨 거름을 옮긴다는 거냐!”
구름이 끼어 그나마 덜 덥다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더는 가능하지 않았다. 결국 비닐로 덮어두고 빨래터 공굴 작업으로 넘어갔다.
모래를 퍼 나르고 시멘트를 섞고 물을 붓고 비비는 일, 이른 바 공굴 일은 성급하게 끝낼 수 있는 게 아니다.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몇 번이고 같은 동작을 반복하며 하루가 통째로 사라졌다. 다행히 비가 오지 않아 마무리는 할 수 있었다.
샤워를 마치니 밤 여덟 시 반. 어둠이 눅눅하게 내려앉기 시작했고, 곧 비가 세차게 쏟아졌다. 웃옷을 챙길 틈도 없이 공굴 위에 비닐을 덮으며 빗발을 맞았다. 빗방울이 워낙 굵어 공굴 표면에 금세 흠집이 생겼다.
데크에 앉으면 다른 세상이 앞에 펼쳐진다. 단지 플라스틱 의자에 불과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선인의 자리가 된다. 같은 풍경인데도 앉으면 달라지는 시야. 비 오는 날은 비 오는 대로, 안개가 낀 날은 안개 낀 대로, 계절이 바뀔 때마다 그만의 표정을 드러낸다. 그 변화가 어쩐지 선경이라는 말과도 어울릴 듯싶다. 물론 스스로에게 하는 작은 미망이겠지만.
멀리 송어 횟집의 네온은 계속 깜박였다. 전답 한가운데에 홀로 떠 있는 불빛이라 이곳에서 보면 더 도드라진다. 초록빛 밭 사이에서 주변에 비슷한 빛 하나 없으니 더욱 선명하다. 호우 속에서도, 짙은 안갯속에서도, 밤을 통과하면서도 그 명멸은 끊기지 않는다.
처음엔 무심히 넘겼던 그 불빛이 점점 시야에 박혔다. 나중에는 문득 이런 생각도 들었다.
“내 젊음은 저 등처럼 그렇게 선명하지 못했구나.”
비는 밤–낮–밤–낮을 이어 쏟아졌다. 그중 첫 번째 밤과 낮은 대책 없이 당하는 비였다. 이곳에서 지낸 여섯 해 동안 폭우는 여러 번 겪었지만, 이렇게 길게 이어지는 장대비는 처음이었다.
세찬 비에도 명멸등은 쉬지 않았다. 평소 집에 잘 들어가지 않던 호비도 자기 집 안으로 들어앉아 조용히 있었다. 범이는 아예 뻗어 자버렸다. 범이는 사색형이 아니다.
토요일, 편이 내려왔다. 창고 지붕을 아예 새로 얹었다. 하지만 범이·호비 집 지붕은 결국 손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