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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옷, 제법 티

자작나무 관찰로 여는 길뫼재의 새해 110113

by 로댄힐

옷은 시간이 흐르면 희던 색이 바래기 마련이다. 그런데 자작나무의 겉옷은 정반대의 길을 걷는다. 처음엔 누렇던 껍질이 해마다 조금씩 더 희어져, 이젠 멀리서도 자작나무임이 제법 티가 난다.


심은 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5년이 지났다. 묘목이 너무 작아서 심을 때 금세 풀숲에 묻힐 정도로 작았는데, 이제는 제법 나무다운 모양새를 갖추었다. 나무가 내는 ‘나무 티’, 자작나무가 드러내는 ‘자작 티’. 그 티가 참 좋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미친다. 그렇다면 내게도 티가 날까. 사람티, 그리고 농부, 농자(農者)로서의 티 말이다.


겉모습만 놓고 본다면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틀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내가 바라는 건 그런 얄팍한 외형이 아니다. 지성과 감성, 인성과 영성이 한 사람 안에서 충돌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균형을 이루며 드러나는 고유한 빛, 그것이 내가 말하는 사람티다.


사람에게서 풍기는 티란 단순히 외모나 몸짓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삶을 대하는 태도에서 배어 나온다. 지성은 세상을 이해하는 힘이고, 감성은 그 이해를 따뜻하게 만드는 온기다. 인성은 타인을 대하는 마음가짐에서 드러나고, 영성은 삶이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스스로의 자리를 자각하게 한다.


이 네 가지가 어긋나지 않고 제자리를 지킬 때 비로소 한 사람의 ‘사람티’가 자연스레 배어 나온다.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균형의 빛처럼. 자작나무의 흰색이 해마다 조금씩 선명해지듯, 사람의 티도 일상 속에서 천천히, 그러나 분명한 색을 만들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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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농자로서의 성품이 보태진다면 어떨까. 농부의 성품은 흙과 계절을 향한 깊은 이해에서 비롯된다. 기다림을 아는 사람만이 씨앗을 심을 수 있고, 포기를 모르는 사람만이 가뭄과 추위를 버텨낸다. 무엇이든 억지로 되지 않는 자연의 흐름을 인정하면서도, 그 흐름 안에서 할 일을 끝까지 해내는 꾸준함과 성실함, 그것이 농자의 마음이다. 또한 농부는 땅을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맡겨진 것을 돌보고, 때에 따라 나누며, 결국 되돌려 주는 삶을 산다. 자연과 사람 사이의 매개자처럼, 묵묵하지만 흔들림 없는 존재감. 그것이 농자의 성품이다.


나는 ‘사람티’와 ‘농자의 성품’ 이 두 가지가 서로를 덮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한 몸처럼 어우러져 새로운 결을 이루기를 바란다. 지성과 감성이 삶의 방향을 잡아 주고, 인성과 영성이 사람의 깊이를 더하며, 그 밑바탕에 농자의 성품이 뿌리처럼 단단히 자리 잡은 모습.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선명해지는 자작나무의 흰빛처럼, 나의 티도 그렇게 진하게 스며나길 바란다.


아는 만큼 조급하지 않고, 느낀 만큼 쉽게 흔들리지 않으며, 좋은 마음을 품되 현실을 놓치지 않고, 영성 깊되 땅을 잊지 않는 사람. 자작나무가 겨울바람 속에서 더욱 흰빛으로 단단해지듯, 나도 내 자리에서 사람티와 농자티가 조화된 나만의 색을 길러가고 싶다.


새해 첫날, 동매리 길뫼재의 겨울 산거를 자작나무 관찰로 시작했다. 내가 심은 나무들을 먼저 둘러보고, 더 올라가 두충나무와 전나무, 소나무도 살폈다. 두충나무는 작은 숲을 이뤘지만 여기저기 잘려 나간 흔적이 아팠다. 큰 전나무와 소나무만큼은 부디 이 자리에서 오래도록 버텨주길 바랐다.


사람에게 겨울은 종종 매서운 계절이지만, 자작나무에는 오히려 살아나는 계절일지도 모른다. 차갑고 선명한 그 가운데서 흰빛을 더해가는 나무들을 바라보며, 나도 나만의 티가 더해지는 새해를 조용히 꿈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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