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은 손과 잡힌 손

01 숨겨진 소설

by 로댄힐

그날 밤, 그러니까 지난 12월 12일이었다. 금곡 영천강 변, ‘숙자의 뜻깊은 생일’을 핑계 삼아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겨울 강바람은 차가웠지만, 불판 위 장어와 사람들 얼굴엔 온기가 돌고 있었다.

이 나이에 다시 모여 앉아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 자리는 이미 충분히 설명되고 있었다.

“자, 오늘의 주인공 숙자 한 잔 더 받아!”

“아이고, 또요? 오늘은 진짜 많이 마셨네.”

“동현이 덕분이다.”

“맞아, 맞아. 동현이 아니었으면 다들 집에서 TV나 보고 있었겠지.”

“건배!”

“건배!”


잔이 부딪히고 웃음이 겹치면서, 오랜만에 만난 얼굴들은 조금씩 예전으로 돌아갔다. 덕담이 오가고, 안부가 이어지고, 사는 이야기가 풀려나오다 보니 화제는 자연스레 풍기에게로 옮겨갔다. 초등학교 시절 유난히 작고 얌전했던 풍기, 그 풍기가 이제는 키도 제법 크고, 술도 잘 마시고, 말도 술술 이어가는 모습이 묘하게 낯설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낯섦을, 세월이 사람을 바꾸는 방식이라기보다, 그저 우리가 서로를 너무 오래 안 보고 살았다는 증거처럼 느꼈다.


젓가락들이 동시에 불판 위로 뻗었다. 노릇하게 익은 장어가 접시로, 또 바로 입으로 사라졌다. 봉규는 어느새 자리를 옮겨 풍기 옆에 앉아 있었다.


“야, 풍기, 너 요즘 완전 딴 사람이다?”

“?”

“너 초딩 때 맨 앞줄에서도 안 보이던 애였잖아.”

“에이, 그건 너무 나갔어. 작긴 했지만.”

“아니야, 진짜 그랬어.”


대식이가 웃으며 술잔을 들었다.

“근데 지금은 키도 크고, 말도 잘하고, 술도 잘 마셔.”

“군대 다녀오더니 사람이 달라졌네.”

풍기는 멋쩍게 웃으며 잔을 내려놓았다.

“그래, 나 군대에서 많이 변했다, 와, 떡 사줄래? 군대도 군대지만, 축협 근무하면서 더 많이 변했다.”

“정도는 해병대 출신이지?

대식이가 능청스레 말을 돌렸다.

“아무튼 나 군대 있을 때 키도 쑥 컸고, 직장에서 일하면서 성격도 많이 바뀌었고….”


그때 저쪽에 있던 길병이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풍기 앞에 술잔을 내려놓고, 늘 그렇듯 고개를 한 번 느리게 끄덕였다. 그리고는 툭, 던지듯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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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말이야, 초딩 1학년 때 내가 풍기 얘 손잡고 학교 데불고 다녔는데.”

순간 테이블이 한 번 더 출렁였다.

“뭐?”

“진짜?”

인중이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야, 그건 처음 듣는데?”

“뭐라카노.”

다들 농담쯤으로 받아들이는 얼굴이었다. 나도 그랬다. 하지만 길병이의 표정은 이상할 만큼 담담했다. 그래서 더 진짜처럼 느껴졌다.

그 순간, 내 귀와 눈이 동시에 번쩍 열렸다.

‘저건 소설이다.’

생각은 번개처럼 스쳤고, 말은 미처 걸러지지 못했다.

“숨겨진 소설!”

말해 놓고 나서야, 내가 그 말에 가장 놀란 사람이 나 자신이라는 걸 알았다.


풍기는 괜히 잔을 만지작거리며 웃기만 했다.

“그 얘긴 하지 말자 그랬잖아.”

“아니, 사실이잖아.”

길병이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지만, 풍기는 살짝 얼굴이 붉어졌다. 키 작은 풍기와 키 큰 길병이, 순간 ‘꺼꾸리와 장다리네!’ 하는 생각이 스쳤다.

나는 그 얘기를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아니, 근데 왜 그랬는데?”

“그러게.”


옆에서 누가 말을 보탰다.

“여동생도 아니고.”

“같은 반 동갑내기잖아. 풍기를 왜 네가 데리고 다녀?”

길병이는 웃으면서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잠깐의 침묵 뒤에 짧게 말했다.

“풍기 아버지가 부탁했어.”

“아버지가?”

“응.”


그 한마디에 자리가 순간 조용해졌다. 길병이는 오래된 풍경을 더듬듯 말을 이었다. 고개 너머 신촌에서 풍기가 하탑에 있는 자기 집으로 오면, 거기서 다시 고개를 넘어 길평 초등학교까지 가야 했던 길. 비라도 오는 날이면 진창이 되어버리던 그 길. 체구가 작아 늘 가방이 몸보다 커 보이던 풍기의 모습.

“길병아, 너 키도 크고 듬직하니까 우리 풍기 좀 같이 데리고 다니면 안 되겠나.”

“그래서?”

“그래서 그냥 ‘예’하고는 그렇게 했지.”


말은 거기까지였다. 대단한 의리도, 감동적인 결심도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는 다 알고 있었다. 초등학교 1학년 짜리가 같은 반 친구 손을 잡고 매일 학교를 오갔다는 일이 얼마나 쉽지 않은지.


나는 그 장면을 떠올리며, 아이였던 우리가 이미 너무 이른 나이에 책임이라는 말을 배워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풍기가 조용히 말을 보탰다.

“맨날 손 잡히고 다니는 게 싫었거든.”

“근데 비 오는 날 있잖아. 내가 넘어질 뻔했는데, 얘가 확 잡아당겨줬어.”

길병이는 괜히 머리를 긁적였다.

“넘어지면 큰일 나잖아.”

“그러니까.”

풍기가 웃었다.

“그때부터 그냥 따라다녔지.”


테이블 위에 다시 웃음이 번졌다. 아까보다 느렸고, 조금 더 따뜻했다. 길병이와 풍기는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다가 잔을 들었다.

“길병이 아버지는 뭐 하시던 분이셨더라?”

삼도는 고개를 갸웃했다.

“쟁기.”

“쟁기?”

“만들고 고치고. 사천, 진주 일대에선 다들 알았지. 우리 아부지가 목수였거든.”

이야기는 자연스레 이어졌다. 풍기 아버지가 쟁기를 고치러 들르던 날들, 집을 비워야 했던 사정들. 그래서 아들을 부탁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정도가 맞장구쳤다.

“아, 맞다. 풍기네 아버지가 쟁기 고치러 들르곤 했다.”

“그러니까.”

길병이가 말을 이었다.

“풍기 아버지가 우리 집에 오셨을 때나 다른 데서 만나면 나한테 얘 좀 챙겨 달라 말씀한 거지.”

풍기가 웃으며 수긍했다.

“그래서 내가 길병이 손에 잡혀 학교 다녔다, 와?”

“그 그림 상상된다.”

“반에서 제일 큰 애랑 제일 작은 애!”


풍기가 장어 한 점을 집어 길병이 앞접시에 올려줬다.

“니 덕분에 내 학교 잘 다녔다이.”

“야, 이젠 네가 더 커 보인다.”

“건배!”


나는 웃음과 소음 속에서도 이 장면을 마음속에 따로 담아두고 있었다. 술잔을 들고 사람들 말에 웃으며 맞장구를 치고 있었지만, 동시에 나는 자꾸 한 발쯤 물러나 이 자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인지 모르게 이 대화가, 이 웃음이 그냥 흘려보내기엔 아까웠기 때문이다. 언젠가 글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아주 자연스럽게 들었다.


그 순간 나는,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이야기를 고르고 있는 사람에 가까웠다.

반에서 제일 크고 강직하게 생긴 아이와, 가장 작고 순한 얼굴의 아이가 손을 잡고 걷던 중탑에서 길평까지의 길. 그 길을 나는 실제로 본 적도, 함께 걸어본 적도 없다. 그런데도 그 장면은 이상하리만치 또렷했다. 아마 나는 지금 이 만찬 자리에, 내 기억 속의 다른 길 하나를 겹쳐 놓고 있었던 것 같다.

조금 있다가 길병이와 인중이, 정도가 먼저 자리를 떴다. 남은 사람들은 다 같이 2층 노래방으로 올라갔다. 길병이가 그 자리에 남았더라면, 풍기 손잡고 학교 다니던 얘기가 더 나왔을지도 모르겠다.


아무도 특별하다고 부르지 않았던 시간 들이나 말없이 손을 잡아주고, 앞서 걸어주고, 혹은 뒤처지지 않게 속도를 맞춰주던 날들. 그런 장면들은 늘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야 비로소 의미를 얻는다. 사랑이라 부르기엔 어딘가 부족하고, 우정이라는 말로만 묶기엔 조금 깊은 관계. 나는 길병이와 풍기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 삶 속에도 그런 이름 붙이기 어려운 장면들이 있었음을 조용히 떠올리고 있었다.


‘내 곁에 서 있는 그대’라는 ‘숨겨진 소설’ 가사가 문득 떠오른다. 길병이는 늘 앞에 서 있었고, 풍기는 그 곁에서 걸었다. 잡은 손과 잡힌 손은 말이 없었고 약속도 없었다. 그렇지만 그 거리는 늘 유지되었다. 멀어지지도, 지나치게 겹치지도 않은 채.


그 거리를 유지하는 일이야말로, 어쩌면 가장 어려운 동행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무도 모르는 숨겨진 소설 속에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 기록되지도, 칭찬받지도 않았지만 분명 존재했던 이야기들, 학교로 가던 길, 고개를 넘던 아침, 비 오는 날 우산 하나를 나누지 못하고도 함께 젖어 가던 순간들…. 그 모든 장면이 쌓여 한 권의 소설이 되었지만, 정작 주인공들은 그걸 소설이라 부르지 않았다. 그냥 삶이었고, 그냥 그렇게 지나온 날들이었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는 끝내 다 하지 못한 말들로 남는다. 잡을 수는 없지만 놓아버리기엔 너무 오래 곁에 있었던 인연처럼 말이다. ‘잡은 손과 잡힌 손’은 그렇게, 아무도 모르는 소설 속에서 지금도 나란히 서 있다. 그리고 나는 그 소설을 우연히 들여다본 사람일 뿐 아니라, 어쩌면 그와 비슷한 문장 한두 개쯤은 이미 살아온 인물일지도 모른다.


이야기를 적는다는 건, 어쩌면 그렇게 지나온 문장을 뒤늦게 알아보는 일인지도 모른다.


팔순을 코 앞에 둔 길병이와 풍기 그리고 나 또 우리들…, 우리들 모두는 어쩌면 각자의 ‘숨겨진 소설’ 속에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모두 어쩌면, 각자의 숨겨진 소설 속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나는 그 생각은 잠시 접어두고, 정말 오랜만에, 몇십 년 만에 잡아본 노래방 마이크를 놓칠세라 두 손으로 꼭 움켜쥐었다. 그날 밤, 나는 이야기를 듣는 손에서, 노래를 잡는 손으로 잠시 옮겨가 있었다.

손은 바뀌었지만, 붙잡고 있던 감각만은 그대로였다.


마이크가 내게로 왔을 때 처음엔 현숙의 ‘내 인생에 박수’를 불렀고 나중엔 최유나의 ‘숨겨진 소설’을 불렀었다. 그것들을 부르기 위해 미리 연습도 좀 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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