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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의 거인

로마 01 / 테르미니의 요한 바오로 2세

by 로댄힐


숙소


로마에서 우리의 숙소는 베스트 웨스턴 우니베르소 호텔(Best Western Universo Hotel)이었는데 여기서 우리는 다섯 밤을 잤다. 테르미니 역에서 남서쪽으로 5분 정도의 거리에 있었는데 들락거릴 때 보니 <아리랑>이라는 한식집도 바로 가까이 있었다. 이곳은 호텔 밀집 지역이라고 한다. 눈에 보이는 건물이 다 호텔인 듯했다. 맏이가 숙소를 정하는데 특별히 신경을 썼다고 했다. 로마는 오래된 도시인지라 엘리베이터가 있는 호텔을 찾기 위해 제법 신경을 썼다고 했다. 방에 들어가니 침대 위의 데코레이션이 인상적이었다.

테르미니

Stazione di Roma Termini라는 역 이름은 역의 맞은편 즉 ‘50인 광장’ 건너편에 있는 고대 디오클레티아누스 욕장(Thermae Diocletiani)에서 따온 말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역 이름이 ‘욕장(浴場)’이라는 의미를 지니는 셈이다. 테르미니 역은 로마의 중심 역으로서 고대 로마에서 도시가 세워진 일곱 구릉의 하나인 비미날레 구릉(Colle Viminale)에 있다.

1863년에 임시 역을 개관한 이후 1950년 현재 건물을 완공하였으며 2006년 12월에는 제264대 교황인 요한 바오로 2세에게 봉헌하였다고 한다. 유럽에서도 규모가 큰 기차역으로서 이탈리아 주요 도시는 물론 파리·뮌헨·제네바·바젤·빈 같은 다른 나라 주요 도시로도 연결된다고 한다.

현재 건물은 매우 길고 현대적인 파사드(전면) 즉 앞쪽이 기둥으로 받혀지지 않은 캔틸레버 식(cantilever) 지붕의 이중 커브 구조로 인해 ‘공룡’이라는 별명으로 불린다고 했다. 참고로 캔틸레버 식 공법이란 한쪽은 고정되어 있으나 다른 끝은 받쳐지지 않은 상태의 보를 말한다는 것이다. 주로 건물의 처마 끝에 사용된다고 했다. 이는 근대적 디자인의 한 특징이라고 한다. <죽기 전에 꼭 알아야 할 세상을 바꾼 발명품 1001>에 포함되는 주제라고 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욕장(浴場, Thermae Diocletiani / Baths of Diocletian)


AD 306년에 로마제국의 45대 황제인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가 세웠다. 욕장이란 고대 로마 때 발달한 대단히 복잡한 공중목욕장을 말하는데 여러 개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휴식과 사회활동을 위한 장소로도 쓰였다. 공공 욕장은 널찍하고 탁 트인 정원 주위로 여러 클럽에 딸린 방들이 사방으로 늘어서 있고 목욕장은 정원 한가운데에 있거나 정원의 뒷부분에 자리 잡고 있었다. 목욕장에는 커다란 냉수 욕실·고온 욕실·미온 욕실과 여러 개의 작은 욕실 및 안뜰이 있었다. 노예들이 지하 통로로 눈에 띄지 않게 재빨리 움직이며 시중을 들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건설에 의욕을 크게 보인 황제였다고 한다. 그리고 건축 업적도 많고. 그는 로마의 인구 밀집 지역에 로마제국 최대의 목욕장을 건설하도록 했는데, 이 공사를 위해 기독교 신자 1만 명을 동원하여 강제노동을 시켰다고 한다.

284년 제위에 오른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혼란스러운 제국에 안정을 가져오기 위해 기상천외한 방법을 내놓았는데 그것은 황제의 수를 늘린 것이다. 황제 두 명에 부황제 두 명을 더해 로마는 모두 네 명의 황제가 나누어 통치하는 나라가 되었다.

그 결과 옥좌를 놓고 벌이는 이전투구는 줄어들었지만, 이 미봉책은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퇴위하자마자 흔들리기 시작했다. 황제들은 다시 패권 다툼을 벌였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콘스탄티누스였다. 그는 다른 황제들을 물리치고 324년에 로마의 유일한 황제가 되었다. 그가 집권하면서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는 종지부를 찍었다.

아무튼,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그리스도교를 가장 심하게 박해한 황제이고 그 뒤를 이은 콘스탄티누스는 그 박해에 종지부를 찍은 황제이다. 극과 극이 교차하는 지점을 테르미니 역 50인 광장 건너편의 ‘디오클레티아누스 욕장’ 즉 ‘천사들과 순교자들의 성모 마리아 대성전(Basilica di Santa Maria degli Angeli e dei Martiri)’에서 나는 보았다.

(1561년, 교황 피우스 4세는 이곳에서 강제노동으로 순교한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86세의 노인인 미켈란젤로를 불러 목욕장 폐허를 성당으로 개축하도록 했다. 1563년에 교황과 미켈란젤로는 폐허로 변한 고대 로마의 경이로운 건축물을 3년 만에 거룩한 그리스도교 성전으로 탈바꿈시켰다. 디오클레티아누스 목욕장을 개조하여 만든 성전의 이름은 ‘천사들과 순교자들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 ‘Basilica di Santa Maria degli Angeli e dei Martiri’다.)


광장의 거인


테르미니 역 앞의 광장 이름은 ‘500인 광장’(Piazza dei cinquecento)이라고 했다. 광장이라고 하지만 각지로 출발하는 버스가 수시로 들락거리는 등 교통 요지이지 텅 빈 광장은 아니었다. 이곳은 에티오피아와의 전쟁에서 전사한 500명의 병사를 추모하여 만든 광장이라고 한다. 부산역 혹은 서울 옆 앞의 광장을 지칭하는 또 다른 이름이 있는지 찾아봐야겠다. 아마 있지 않을 것이다.

아무튼, 광장에서 첫눈에 띈 것은 거대한 청동상이었다. 앞으로 가서 보니 요한 바오로 2세 동상이었는데 2011년 5월에 세워졌다고 한다. 제작자는 유명한 조각가 올리비에로 라이날디(Oliviero Rainaldi)라는데, 교황을 모더니스트 풍으로 형상화한 것이 제작 의도였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 동상은 처음에 바티칸 조형물 심의위원회가 스케치를 토대로 검토한 뒤 건립을 승인한 것으로, 약 5 m 크기로 제작하여 로마의 관문에 해당하는 테르미니 역 앞에 세운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세워진 직후부터 바로 비판의 소리가 빗발쳐 난리 아닌 난리가 났다고 한다. 시민들은 “군대의 보초 상 같다. 요한 바오로 2세가 아닌 요한 23세의 얼굴”이라고 깎아내렸으며, 나중엔 'A 벙커', '노숙자의 쉼터', '화장실', '요한 바오로 배트맨'이라는 말도 생겨났다는 것이다.

제작자는 “요한 바오로 2세가 한 아이를 망토로 품는 사진에서 영감을 얻어 모든 사람을 수용하는 동작을 표현했다. 나는 요한 바오로 2세를 닮은 작품을 만들려는 게 아니라 그가 세상 속으로 뛰어들었던 점을 형상화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해명했지만, 로마 시민들은 끔찍한 얼굴, 움푹 들어간 눈, 바람에 넘어질 듯 한 외투, 결국은 작은 공간에 묶어 놓은 아주 추악한 동상이라고 혹평하였다.

그러나 시민들은 "사랑받는 교황의 모습이 아니라 파시스트 독재자 무솔리니를 보는 것 같다."며 비난했고 나중엔 스케치를 보고 승인한 바티칸 교황청 측도 "요한 바오로 2세와 닮은 데가 별로 없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이에 마 시장은 시민들의 의견을 반영해 예술가, 문화재 담당자, 학자들을 소집해 동상 보수 공사를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결국, 리모델링에 들어가, 2012년 1월에 보완 작업이 시작된 후 거의 1년이 지나 드디어 2013년 11월 19일 그 모습을 다시 드러냈다고 한다.

배트맨 같았던 모습이 온화한 모습으로 바뀌고 보초병 같았던 모습도 말끔하게 사라졌다. 시커멓던 얼굴도 빛나는 얼굴로 바뀌고 목만 덩그렇게 올라가 흉하게 보이던 모습도 옷깃을 첨가함으로 자연스럽게 되었다. 푸른 녹을 제거하고 각 난 모서리를 최대한 부드럽게 깎는 것이 최고의 과제였는데 이제는 벙커 같은 느낌을 주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도 남은 흠집은 어쩔 수 없었다는 거.

이렇게 해서 작가의 표현대로 제목(친교, 대화, 교제)대로 평화의 상징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로마를 찾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는 모습이 된 것이다. 성형 과정을 거쳐 공개된 교황의 얼굴은 입가의 미소와 부드러운 턱 선이 강조됐으며, 현지 언론들도 "교황의 얼굴이 훨씬 온화하게 바뀌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고 한다.




1984년 요한 바오로 2세가 한국을 방문하여 부산에 오셨을 때 나는 직장을 잠시 벗어나 ‘교황 방한 행사 준비 사무국’에서 한 6개월간 심부름했다. 이 인연으로 요한 바오로 2세는 다른 교황들보다 더 내게 가까운 분이다. 더구나 여의도에서 마지막 교황 행사를 할 때 맨 앞의 ‘브이 아이 피’ 좌석엔 부산교구에서 평신도 몫으로는 한 장 나온 좌석을 내게 주어 교황님을 가까이서 뵐 수 있게 되었다. 지금이야 그렇지만 그때는 처음 오시는 교황을 가까이서 뵙는다는 것은 가톨릭 신앙인에게 영광된 일이었던 거. 내 전후좌우로 앉은 사람들 명패를 보니 장관, 국회의원들이었다. 그때 일한 소감을 어느 신문 청탁을 받고 기고한 적 있는데 가만있자, 어느 신문이더라?

다른 교황들은 이런 인연, 인연 아닌 인연을 맺을 기회가 없었지만 이 분과는 이런 인연을 맺은 것이다. 그때 처음으로 한국을 찾아오시는 교황에 대한 기대와 열광은 대단했다. 나는 행사 사무국에서 심부름하면서 정부와 부산시와 관련하여 진행되는 일의 흐름을 많이 엿보았다. 전두환 정부 시절의 정보·보안·경호 관련 담당자들의 서슬 퍼렇던 기세도 그때 보았고.

테르미니 50인 광장의 교황 청동상을 거인이라고 했지만, 그냥 바닥에 세워져 있는 게 인상적이었다. 서울 광화문의 이순신 장군 동상 등, 우리나라 동상들 가운데 바닥에 그냥 서 있는 동상이 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속이 텅 빈 동상….

제작자의 처음 의도가 여론 때문에 훼손된 건 안타깝다. 돌아와서 처음 세운 그 동상 즉 리모델링하기 전의 동상 사진도 찾아서 보았다. 과연 온화한 모습은 아니었다. 그래도 그렇지 긴 안목에서 보면 오히려 그 모습이 실제 인물의 성덕(聖德)을 더 예술적으로 평가했다는 평을 들을지도 모르는데 우선 보기가 불편하다는 숙덕공론에 제작자의 본 의도가 훼손된 건 아쉬운 일.

지금 말하고 있는 것들은 내가 현장에 갔을 때 이런 안목을 가지고 본 것이 아니라, 다녀와서 자료를 찾으면서 다녀온 곳을 다시 공부한 것을 본 것에 덧씌우는 것이다. 로마에 관한 책도 몇 권 샀고 인터넷 서핑도 했다. 로마에 관한 영화도 몇 편 준비했고. 테르미니 역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 ‘종착역’은 봤고. (보고 와서 하는 로마 공부 그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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