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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댄힐 Sep 21. 2016

밀정과 기차, 기차 노래

https://youtu.be/3x51aQRf8tI


영화 ‘밀정’을 본 후 ‘기차는 8시에 떠나네’가 생각났다. 아마 ‘기차’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가타리나 행 기차


애수 어린 선율 속에 겉으로는 연인의 이별을 그리고 있는 노래, ‘기차는 8시에 떠나네(To Treno Fevgi Stis Okto)’는 사실 그리스 민주화 운동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곡이라고 한다. 이 노래를 부른 사람도 사람이지만, 만든 사람을 잠시 생각해 본다. 


이 노래를 만든 미키스 테오도라키스는 그리스의 암울했던 현대사의 한가운데 서 있었던 인물인데, 유서 깊은 지역인 그리스 크레타 섬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비잔틴 성가와 그리스 민속 음악을 배우며 작곡가로서의 능력을 쌓았다고 한다. 2차 세계 대전으로 독일이 침공했을 때 레지스탕스에 가담했고, 전쟁 이후 좌우로 나뉜 내전 속에서는 좌파에 가담해 혹독한 시련과 고초를 겪기도 했다. 이러한 성향은 그의 음악 속에도 반영되어 그리스의 음악 전통을 바탕으로 한 민족적인 곡들을 쓰게 되는데, 67년부터 시작된 군부 정권의 독재 치하에서는 대부분의 작품들이 금지곡 처분을 당하고 구속과 고문 끝에 국외로 추방당하기까지 했다. 


군부 정권이 끝나고 난 뒤에야 조국에 돌아올 수 있었던 그는 ‘부주키’라는 그리스 악기의 울림이 담긴, 또 그리스 하층 음악인 ‘레베티카’의 전통에 특유의 서정성을 부여하며, 시대의 아픔과 조국의 슬픔을 담아냈다는 평을 들었다고 한다. 이런 배경에서 들으니 ‘기차는 8시에 떠나네’는 더 깊은 울림을 준다.


그 시절 이 노래


60, 70년대는 세계적으로 젊음의 저항이 들불처럼 번지던 때다. 그런 시절에 맞게 테오도라키스의 노래는 자유와 평화를 위해 싸우던 세계 사람들의 가슴에 화살처럼 꽂혔다고 한다. 순수한 사랑과 이별의 노래로도 손색이 없는데 거기에 민주화운동, 그 고난에 찬 투쟁의 역사까지 담았으니 투사들의 심금을 울리는 건 지극히 당연했다. 


그건 이 땅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그리스가 쿠데타, 역 쿠데타를 거쳐 73년 국민의 힘으로 민주화를 이뤄낸 후, 기차가 8시에 떠난다는 이 노래는 소위 운동권에서 조용히, 그러나 빠르게 번져나갔다. 사실 오랜 군사정권과, 그에 저항한 투쟁의 역사가 깊은 한국인 정서에도 이 노래는 맞아떨어졌던 것이다. 가사에 ‘민주화’니 ‘독재타도’니 ‘투쟁’이니 ‘진격 ’등 전투적, 도발적 단어는 한마디도 들어가지 않았지만 ‘ 비밀과 아픔, 이별을 여린 수동형으로 그린 것도 많은 이의 공명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이다. 직접 민주화운동 투쟁에 나설 수는 없지만,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정권 압정에 반발하고 민주화를 갈망했던 시민들은 몰래 혼자 노랫말을 외워보기도 했다. (이 지점에서 부끄러움이 슬그머니 고개를 든다. 그 시절의 나는? 이 시대의 나는?)


경성 행 기차


추석 연휴 이튿날, 경성(쎄울)에서 내려온 아이들과 함께 ‘밀정’을 봤다. 긴 영화였다. 여기서 끝이구나 하는 장면이 세 번이나 더 이어진 후 영화는 끝났다. 기차는 이 영화에서 우리 민족의 그 시대 역사, 시대성을 상징했다. 감독은, 이 영화에서 눈여겨볼 대목이 세 군데 있다고 했다는데 그중 하나가 기차 장면이다. 영화의 중간 지점에서 전개되는 20여 분 기차 장면은 감독의 역사관이 많이 반영된 장면이라고 한다. 


의열단이 탄 기차에 그들을 쫓는 일제 경찰 이정출(송강호)과 하시모토(엄태구) 일행이 올라타면서 본격 기차 신이 전개된다. 의열단 김우진(공유)은 자기 조직 내의 밀정을 색출하기 위해, 일본 경찰들은 여행객 속에 숨은 의열단을 색출하기 위해, 기차를 타고 통로를 왕래한다. 의열단의 특별한 초대를 받은 이정출(송강호)은 안절부절못하고. 

밀정 기차 장면에서 가장 긴박한 순간

김지운 감독에게 기자가 물었다. “기차 시퀀스는 시나리오 초고에 있던 신인가? 장르적 쾌감을 주더라.” 감독은 이렇게 답한다. “수정 전에는 기차를 타다 내려서 인력거를 타고 압록강 다리를 건너가는 장면이었다. 기차를 상징적인 의미로 봤다. 상해에서 폭탄을 싣고 경성으로 가는 것이 목적이지만 기차 자체를 역사로 본 거다. 역사에 실려 가는 이정출(송강호)과 김우진(공유)을 넣었다. 김우진은 기차에서 직선 이동을 한다면 이정출은 다양한 동선을 가진다. 시대의 압박 속에서 혼란스럽고 딜레마를 겪고 있는 모습을 압축해서 보여주는 거다. 김우진(공유)이 망설임 없는 운동성을 가지고 있다면 이정출(송강호)은 시대를 온몸으로 받는 인물이다. 단순히 상해에서 경성으로 가는 이유 말고도 시대를 이야기하는 코드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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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밀정’은 우리의 현주소를 다시 확인하게 하는 계기의 영화였다. 요 근래 어떤 사람들이 48년 8월 15일을 건국일로 만들자고 주장하는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한 영화였다. 그리고 또 아픈 곳을 건드리는 영화였고. 아픈 곳? 지금 나는 잘 살고 있는데 이 잘 사는 것이 이 땅의 근현대사 과정에서 특히 일제에 저항하여 몸 바쳐 희생한 이들에 대해 잘 모르고 있는 점. 


영화 ‘밀정’은 이른바 ‘국뽕’ 영화는 아니었다. 국뽕? ‘국가’와 ‘히로뽕’의 합성어라고 한다. 국가에 대한 자긍심을 과도하게 도취시키는 영화나 형태를 말하는 용어. 국뽕 신드롬에 반대되는 형태를 지칭하는 용어로 ‘국까’라는 게 또 있다는데 말 그대로 이는 ‘국가’와 ‘까다’의 합성어라고 한다. 즉 한국을 악의적으로 폄하하는 경향을 지칭하는 신조어이다. (신조어, 참 많이 생긴다.) 밀정은 또한 ‘국까’ 영화도 아니었다.


아무튼, 나는 이 영화를 보고 ‘기차는 8시에 떠나네’를 더 연습하여 남들 앞에서 한번 색소폰으로 소리를 내어보리라고 의지를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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