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야스퍼스의 『철학Ⅰ 철학적 세계정위』를 읽기 시작하면서
6월을 바로 눈앞에 둔 지금은 들판이 또 한 번 비워질 때다. 11월의 비움은 채움이 곧바로 뒤따르진 않지만 지금 이때의 비움은 채움으로 바로 이어진다. 눈 아래 저기 너른 들판, 요새는 11월에도 6월을 하루 앞둔 5월 지금에도 잘 비워지지 않는다. 나무 등 대체작물이라고 하는 것들로 많이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군데군데 누런 빛 보리밭은 하나씩 물빛으로 바뀌어진다.
논가에 섰다. 물이 찬 논이다. 내가 산기슭에서 내려다보는 들판의 논이 아니라 죽음을 마무리한 누구의 주검 조문 길에 잠시 멈춰 스무여 발 걸은 논길이다. 비운 후 채워진 것은 물, 평평한 물의 논은 마음을 가다듬게 한다. 삶의 최전선에서 두어 발 물러나 은둔적 삶을 살다시피 사는 나의 마음은 아무래도 동요가 덜하다. 그래서 새삼스럽게 가다듬을 헝클어진 마음은 따로 없다. 그래도 6월의 빈 논 채워진 평평한 물은 거울이 되어 내 마음의 굴곡, 나의 속물 의식을 두드러지게 드러낸다.
"나는 학문과 순수한 공기와 현실을 원했다. (중략) 내가 무엇을 사랑했는지, 내가 저급하다고 피한 것은 무엇인지, '자연'과 '이성'을 넘어서는 어떤 것으로 사유 속에서 고무하며 나타난 것이 무엇인지…."(칼 야스퍼스, 『철학Ⅰ 철학적 세계정위』 025쪽)
칼 야스퍼스의 『철학Ⅰ철학적 세계정위』를 샀다. 672페이지의 큰 책이다. 역자에 의하면 “야스퍼스는 기존의 철학자들이 철학적 사유의 철학적 사유의 본질적 기능을 망각하고, 과학을 흉내 내거나 삶과 유리된 이론적인 작업을 전개했다고 비판하며, 자신이 철학을 제대로 바로 세우겠다고 선언한다. 이런 의도에서 야스퍼스는 감히 책 제목 자체를 ‘철학’이라고 정한 것이다.”(006쪽) 역자는 독일어 원전을 우리말로 옮기는 과정이 힘들었지만 “존재의 비밀을 풀려는 철학적 거장의 호흡과 열정과 현실에 굴하지 않는 순수한 의지를 글자 하나하나에서 확인하는 즐거움”(007쪽)도 컸다고 말한다.
역자가 이 책을 번역하면서 확인한 그 즐거움을 나는 독자로서 읽으면서 확인하려고 한다. 야스퍼스의 철학Ⅰ권과 Ⅱ권 및 Ⅲ권의 영어본을 독일어 원전과 간간히 대조하면서 읽었지만 아주 오래 전의 일이었는지라 지금 생각하면 무엇을 읽었는지 하나도 모르겠다. 다시 읽으려고 한국어 번역본이 언제 나오려나 하며 기다리고 있었는데, 지난해 말에 출판된 것을 지금껏 모르고 있다가 이번에 알게 되어 곧바로 주문했다. 출판 사실을 알고 나서 어찌나 반갑던지. Ⅱ권 및 Ⅲ권의 번역 출판도 기다리고 있다.
사실 산기슭 생활에서 책에 몰두할 시간 내기가 쉽지 않다. 250여 페이지의 수필집 한 권도 제대로 읽어낼 시간 갖기 어려운데 하물며 670여 페이지의 철학 책 한 권을 과연 완독 해낼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완독 한다 해도 시간이 얼마나 걸린 것인지. 그런데 야스퍼스 『철학』 정독할 생각은 하루아침에 한 것이 아니고 오래전부터 품고 있던 바여서 곧바로 책을 편다.
사실 생물학적 나이로 치면 들만 큼 든 나이인 이 나이에 철학 책 읽어 뭐하겠느냐는 생각이 안 드는 것도 아니다. 삶을 원숙하게 살았으면 자기 철학, 자기 세계관을 피력해도 모자랄 나이인데 남의 철학 읽겠다는 이야기를 이렇게 활자화하고 있는 내가 모자라도 제법 모자란다는 생각도 또한 든다. 하지만 바로 이 ‘모자라는 이 사실’을 나의 지적 현주소로 자리매김하면 마음이 편해진다. “세계와 인간과 초월적인 것이 갖고 있는 숨은 의미를 끈질기게 추적하는 야스퍼스 사유의 진정성”(008쪽) 때문에 나는 야스퍼스를 택했다. 그의 사유의 길, 그의 철학 여정을 나는 따르고 싶었다. 지금보다 훨씬 더 젊었던 나이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