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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圓柱)와 우리 목욕탕 굴뚝

로마04) 로마의 베네치아 광장에서

by 로댄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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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트라야누스 원주를 보고 있다. 40m 높이의 기둥과 그 기둥을 나선형으로 타고 올라가는 약 2,500여 개의 부조작품은 의미를 알고 가까이서 보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하지만 가까이 갈 수도 없었고 바로 앞에서 보고 있을 당시엔 역사적 배경을 몰랐으니 그때 난 놀라지 않았다. 돌아온 지 1년이 지난 지금 자료를 뒤져 확인하면서 놀라는 척한다. 부조들은 다키아 전쟁을 묘사하고 있는 데 18개의 대리석 덩어리로 이루어진 트라얀 원주는 원래 채색되어 있었으며 트라야누스 황제의 동상이 그 꼭대기를 장식하고 있었다고 한다. 지금 보고 있는 꼭대기의 저 동상은 1587년에 대체된 성 베드로 동상. 하지만 황제의 유골은 기념주 바닥 묘실에 안치되어 있다고 한다.


트라야누스 황제, 그는 제국의 영역을 최대로 넓히는 군사적 업적을 이뤘을 뿐만 아니라 건실한 내치로 제국의 번영을 이끈 전성기를 연 현제로 평가받지만 그다지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너무 심심한 그의 성격에 있었는데 천성이 군인이었던 지라 별다른 성격상의 특징점을 보여주지 않았다. 화려하지도 않았고 자신의 전공을 뽐내는 것에도 서툴렀다. 이를테면 홍보에 약했던 셈이다. 실질과 강건이 그의 성격을 지배하는 중대한 요소였을 것이다. 반면 그가 지은 유명한 건축물들은 대부분 웅장한 크기를 자랑한다. 게다가 그가 한 공사는 광장, 다리, 목욕탕 등으로 공공시설의 성격이 강했다. 황제 자신을 위해 한 공사는 그다지 없다. 현재 지금 정 중앙의 트라야누스 원기둥을 제외하고 유적이 많이 파괴된 상태다. 무솔리니가 한 짓이 원인이다. 다키아 정복 기념으로 세운 트라야누스 원주는 황제 본인이 아닌 원로원이 지시한 공사다. 아무튼, 지고의 황제라 불린 트라야누스의 이런 능력과 자세가 이 시대의 치자(治者)들에게 주는 교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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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에 세워진 원주(Column)가 5개 정도 되는 모양이다. 그런데 나는 여기에 와서 대단한 유적의 한 부류인 원주를 보면서 우리나라 도시 목욕탕 굴뚝을 연상했다. 로마를 걸으면서 보게 되는 오벨리스크(Obelisk, 방첨탑)는 4각이 진 탑이니까 그걸 봐도 목욕탕 굴뚝이 연상되지 않는데, 원주(Column)는 그걸 볼 때마다 내 뇌리엔 우리나라의 목욕탕 굴뚝이 스쳐 지나가는 것 아닌가.


목욕탕 굴뚝, 지금은 쓰지 않고 방치된 목욕탕 굴뚝이 부산에만 500여 개 있다고 한다, 방치된 굴뚝들은 금이 가 안전을 위협하고 있으며 지진에도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어 그 위험은 더 크다는 것이다. 철거비용이 개당 2천여만 원이나 되다 보니 손을 쓰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고 있다고 한다. 낙뢰방지용 피뢰침이 떨어져 나간 것도 부지기수여서 낡은 굴뚝 기둥은 이래저래 환경과 안전을 해치는 흉기로 변해가고 있다.

01-3.jpg (부산의 어디 방치된 목욕탕 굴뚝)

아파트 대단지 유해물질 배출용 굴뚝, 이것들은 70~80년대 대규모 단지를 조성하면서 중앙난방으로 발생하는 유해물질 배출용으로 세워졌다. 그 높이가 큰 것은 70여 m나 된다고 한다. 그러나 대부분 지역난방 또는 개별난방으로 바뀐 굴뚝은 처치 곤란한 애물단지 신세가 됐다. 서울 노원구만 해도 이러한 굴뚝 60여 개가 남아 있는데, 내구연한이나 지진 시 안전성 등을 고려할 때 철거해야 한다는 주장에 힘이 실리지만 굴뚝 한 개에 최대 2억 원에 달하는 철거 비용 때문에 쉽게 엄두를 내지 못하는 단지도 많다고 한다. 이와는 반대로 아파트 굴뚝이 우리 주거환경의 발전상을 보여 주는 역사의 흔적인 만큼 보존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고 한다. 서울시 도시계획위원회가 잠실주공 5단지 재건축 심의 안을 통과시키면서 단지 내 굴뚝 보존을 요구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01-4.jpg (서울 어느 아파트 대단지 유해물질 배출용 굴뚝)

인류의 영원한 유적지 로마에 와서 유적지 가운데서도 기념비적인 원주, 트라얀 원주를 보면서 우리나라의 굴뚝, 둥근 목욕탕 굴뚝을 떠올리다니 그런 내 머리는 문화적으로 덜 여과된 것인가. 목욕탕 굴뚝같은 원주 저 뒤로 유난히 흰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그쪽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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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눈에 띄는 저 건물,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기념관(Monumento Nazionale a Vittorio EmanueleⅡ)이라고 한다. 신고전주의 양식의 백색 대리석 건물이라고 하는데, 이탈리아가 통일된 단일 국가로 재출발하는 것을 축하하고, 국가의 자부심과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해 세워진 건축물이라고 한다. 로마제국이 무너진 이후 이탈리아는 분열되었고 분열된 국가들의 국경선은 시대마다 변했다. 로마가 이탈리아 수도가 된 것은 1870년에 이르러서였다. 1871년에 통일 왕국을 이루었고. 당시 로마를 수도로 선포한 왕이 바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1820-1878)인데 그를 기념하는 이 기념관의 겉모습은 다소 과장되기는 했어도 고대 로마의 영광을 재현한 것이다. 1885년에 첫 삽을 뜬 후 45년만인 1911년에 완성된 이 기념관은 유난히 흰색 때문에 주위 광경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비난을 많이 받았으며 ‘케이크 덩어리’ 혹은 ‘타자기’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러고 보니 내 눈에도 타자기 혹은 케이크 덩어리 같기도 하다. 하지만 내 눈엔 보기가 좋다. 뚜렷이 각인되어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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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무렵의 우리나라 역사는? 1860에 최제우 선생이 동학을 창시했고, 1863년에 고종이 즉위하고 흥선대원군 집권했으며 1866년에는 병인박해, 병인양요가 있었다. 그리고 1871에는 신미양요, 1876년에는 강화도 조약 체결. 1882년에는 임오군란이 또 미. 영. 독 등과 통상조약 체결하며 1883년에 태극기를 사용하게 된다. 말하자면 이탈리아가 통일을 이루던 이 무렵에 우리나라 정세도 어지러웠다. 이건 다른 나라 사정도 마찬가지. 1861에는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발발하고 1863년에는 링컨이 노예해방을 선언한다. 1868년에는 일본에서 메이지유신이 선포되고, 1871년에는 독일제국 성립하고, 1877년에는 인도제국이 성립한다.


사실 내가 지금 구태여 확인하지 않아도 될 로마사를 돋보기 쓰고서 살펴보고 있는 것은 들인 여행 경비의 본전을 뽑기 위해서다. 아이들이 부모인 편과 나에게 유럽 구경시켜 주기 위해 들인 비용이 만만치 않다. 아무튼. 케이크 같다는 저 건물을 돌아 어느 지점으로 가니 앉을 곳이 있다. 거기 앉아 보니 앞에 붉은 벽돌색 건물이 있다. 베네치아 궁전 건물이라고 한다. 그 맞은편 건물은 모양이 똑같지만 색이 아주 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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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 광장(Piazza Venezia)은 테르미니 역 앞 ‘500인 광장’과 더불어 로마의 교통 중심지 중의 하나이다. 로마여행을 하다 보면 반드시 지나칠 수밖에 없는 곳. 이 광장은 중앙에 있는 에마누엘레 기념관 계단에서 정면으로 보면, 좌측의 갈색 베네치아 궁전과 맞은 편의 연노랑 복제 건물은 현재 아랍은행이 자리하고 있다고 한다.

베네치아 광장이라는 이름이 불리게 된 것은 바로 이 베네치아 궁전(Palazzo Venezia) 때문이라고 한다. 1451년 당시 추기경인 베네토 피에트로 바르보(Veneto Pietro Barbo)에 의해 르네상스식으로 보수되었는데, 본래 산마르코 교회(Church of San Marco)에 봉직하던 추기경들의 자택으로 세운 차분한 분위기의 중세 건물이었다고 한다. 1469년 교황 궁전이 되면서 대대적으로 확장하였고 1564년에는 교황 비오 4세가 베네치아 공화국의 환심을 사기 위해 베네치아 공화국 대사의 사저로 제공했다. 현재는 국립 베네치아 궁전 박물관이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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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이 건물은 로마의 주요한 정치적인 역할을 해 왔다. 이 베네치아 궁전에서 많은 정치가가 이 발코니에서 연설을 했으며 지금도 이탈리아를 아는 사람들에게는 주요한 의미를 던지는 건물이다. 특히, 이곳을 집무실로 사용하던 무솔리니의 제2차 대전 참전 선포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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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에 교황 바오로 2세(Paolo II, 1464 - 1471년)가 된 피에트로 바르보(Pietro Barbo)는 베네치아 출신으로서 야심 찬 젊은 사제였던 그는 초고속 승진으로 추기경으로 서임되어 관대한 성품 때문에 처음에는 많은 인기를 누렸다고 한다. 그런데 교황이 된 후로는 달라졌다. 그는 공개적인 자리에서 볼연지를 찍은 모습으로 나타나곤 하였으며, 다이아몬드, 사파이어, 에메랄드, 토파즈, 대형 진주를 비롯하여 각종 귀금속으로 화려하게 치장한 교황관을 머리에 쓰고 다녔다. 권위와 허영을 다소 좋아한 바오로 2세의 취향은 바로 이 베네치아 궁전에서 드러났다. 자기의 지시로 재건축된 이 별궁을 그는 자기의 주요 거처로 삼았다. 그는 여러 예술작품을 수집하여 이곳에 전시하였다. 그는 1471년에 갑작스럽게 심근 경색으로 선종하였는데 멜론을 지나치게 많이 먹다가 급성 소화 불량으로 쓰러진 것으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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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6월 2일에 이 베네치아 광장에서 이탈리아 통일 기념행사가 거행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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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마지막으로 들리려는 곳은 트레비 분수. 그곳으로 발길을 돌린다. 가는 도중에 레스토랑에 들렸다. 아마 아이들이 미리 서핑하여 찾은 집, 메뉴도 아이들이 유심히 선택했다. 맛있게 먹은 후 다시 골목으로 들어선다. 유월의 로마 태양, 한국보다 덜 작열하지 않는다. 트레비 분수로 가고 있다. (2017년 7월 18일) (다녀온 후 확인하는 투박한 로마사 공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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