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마음이 쓰이던 아이가 있었다.
여러 가지 어려운 사정이 있어서
내가 애를 썼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 아이가 그냥 눈에 밟히기도 했다.
그래서 내 교직을 통틀어서
다시는 그렇게까지 애를 쓸 수 있을까, 싶은 일도 했었다.
돌아보면 교사의 권한을 한참이나
넘어서는, 월권인 일이었다.
그리고 위험했지만
내 교직 인생에 남는 훈장 같은 일이기도 했다.
더 이상 담임이 아닌 시기가 되고 나서도
그 아이가 종종 생각났다.
그 아이는 전학을 가서
학교 안에서는 더 이상 보지 못했었다.
나에게는 그 아이의 연락처가 남아 있었고
잘 지내는지 정말 궁금하고 안부를 묻고 싶었다.
경력이 많은 선생님과 함께 얘기를 하다가
그 아이 이야기를 했던 적이 있었다.
그 아이가 꿈에 나왔던 날이었다.
걔한테 연락을 해볼까 봐요.
아니, 선생님. 연락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왜요?
내가 보니까, 오히려 서로에게 실망하게 되는 경우가 많더라.
그 이후까지 책임져줄 수 있는 게 아닌데,
괜히 들쑤시는 것일 수도 있거든.
아…
오히려 선생님은 왜 그 아이에게 그렇게까지 했는지,
지금까지 마음에 남았는지 생각해 봐야 해.
그런 건 선생님 마음에 이유가 있어.
많은 여운이 남았던 대화였다.
선생님은 오랜 제자가 굉장히 무리한 요구를 했던 경험으로
큰 상처를 받으신 적이 있었다.
더 그래서 방어적으로 말씀하신 것도 있었다.
쓸데없이도, 나는 선생님이랑 대화 이후로 생각이 많아졌다.
왜 그 아이의 안녕이 오랫동안 궁금했을까.
생각해 보면 그 아이의 어려웠던 환경과는 별개로,
그 아이는 묘하게 어릴 적의 나를 닮았던 부분이 있었다.
삐쭉- 하고 잘못 튀어나온 못 같았다.
어딜 가든 흐릿해지고 싶지 않아서 애를 쓰고
그 때문에 누군가에게 쉽게 상처 주기도 했었다.
어쩌면 그 아이가 정말 잘 있기를 바랐던 것은,
어릴 적의 내가 잘 있기를 바랐던 마음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 아이에게 더 잘해주지 못했던 아쉬움을
만회하고 싶은 마음도 있고 말이다.
그리고 내가 그 아이를 위해서 그렇게까지 했던 건,
어릴 적 나에게 잘 해주고 싶어서 그랬던 것도 있지 않을까.
그제야 나는 안부를 묻고 싶었던 마음이
오롯이 그 아이를 위해서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 아이에게 연락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건 결국 내 욕심으로 그 아이 인생에 아무것도 아닌 내가
잠깐 나타나도 될까, 망설여져서 말 걸지 못했다는 결말이다.
그래도 나중에 길에서 만나게 된다면 환하게 웃는 얼굴로
꼭 반갑게 잘 지내냐고 묻고 싶다.
어떤 아이들은 꼭 거울 같아서,
유난히 마음에 큰 자국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