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진지 Jul 12. 2019

네발로 기어서 출근한 이야기

술은 마시지 않았습니다.

나는 네발로 기어서 출근한 적이 있다. 전날에 술을 마셨다거나 몸이 아파서가 아니었다. 지각을 피해야만 한다는 집념이 나를 4족 보행하게 만들었다. 이전 에피소드에서 밝혔듯 나의 첫 회사는 한남동에 있었으며 출근은 8:30분까지였다. 통근은 '동인천역-용산역-한남역'을 거치는 편도 2시간의 코스인데 용산역에서 한남역까지 가는 당시의 경의중앙선은 배차간격이 길고 열차 지연도 잦았다. 비록 제시간에 출발했어도 열차를 놓치면 지각이었다.


나는 지각을 무척 싫어한다. 남이 지각하는 건 솔직히 상관없다. 지각하면 그들이 손해지, 내 손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근데 나 자신이 지각하는 건 너무너무 싫다. 도덕적인 관념 때문은 아니고 억울하기 때문이다. 하루는 너무 피곤한 나머지 알람을 듣지 못한 적이 있다. 눈을 뜨자마자 쎄-한 이 기분. 아침 7시, 지각이었다. 7시는 절대 늦은 시간이 아니다. 누군가는 아직 꿈나라에 있을 수 있고, 누군가는 이제 막 눈을 떠서 출근 준비를 하는 이른 아침이다. 하지만 편도 2시간이 걸리는 통근러에게 아침 7시는 이미 지각이 공표된 시간이었다. 그나마 늦잠은 덜 억울한 편에 속한다. 열차 지연처럼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변수가 터졌을 때, 그때가 제일 억울하다. 얼마나 싫었으면 편도 2시간 코스도 모자라 30분 더 일찍 집에서 출발하는 결정을 내렸을까.


하지만 그날은 이런 30분 조차 모자란 날이었다.


설마 한사토이? (feat.한남동 지구대 클라스)


출퇴근 시간에는 지하철도 버스처럼 막힌다. 하지만 이 날은 유난히 더 막히는 날이었다. 결국 평소보다 늦게 용산역에 도착했다. 전광판을 바라보니 한남역 방향의 경의중앙선이 열차 플랫폼에 '도착'했다는 안내 문구가 나오고 있었다. 용산역에서 환승해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그곳은 계단도 많고 높이도 가파르다! 열차를 놓치지 않기 위해 계단을 두 칸씩 올라갔다. 허벅지가 터질 것 같았지만 멈출 순 없었다. 동시에 다리의 힘도 서서히 풀려갔다. 평지에 도착한 것도 잠시, 다시 경의중앙선 플랫폼 쪽으로 내려가야 했다. 비슷한 사정의 사람들과 함께 우다다 달려갔다. 빠른 속도로 계단을 내려가고 있는데 2칸 정도를 남겨놨을 때 다리의 모든 힘이 풀리면서 넘어졌다.


다행히 손잡이를 잡고 있어서 다치진 않았다. 하지만 열차 안의 사람들이 넘어진 나를 보고 있었다. 걱정하는 누군가의 목소리도 들렸다. 너무 쪽팔렸지만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손잡이를 지지대 삼아 얼른 일어났다. 열차 쪽으로 다시 발을 내디뎠지만 한 번 빠진 힘은 들어오지 않았다. 결국 열차 입구 앞에서 또다시 넘어졌다. (열차 안에는 들어가지도 못했다!) 다리에 힘은 없지, 열차는 놓치기 싫지. 선택은 4족 보행뿐이었다. 나는 팔과 무릎으로 엉금엉금 기어서 열차에 탑승했다. 지각을 피했다는 생각에 안도감이 밀려왔지만 동시에 나를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도 느껴졌다. 아까는 몰랐던 부끄러움과 민망함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다리에 힘이 들어오자마자 얼른 옆 칸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날 나는 무사히 정시 출근을 했다.

작가의 이전글 잠은 인천에서, 삶은 서울에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