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창한 날이 아니라 다행이다. 5월에 흐린 날을 기대하는 건 쉽지 않다. 오늘같이 적당히 흐리고 우중충한 날은 나에겐 말할 나위 없이 그럴싸한 날이다.
“젠장 할 5월은 좀 흐리자, 얼마나 좋아?”
“뭐래?”
날씨가 너무 좋으면 내 처지가 더 초라해지는 것 같다는 말에 은성은 동그랗게 토끼 눈을 뜨고 되받아쳤다.
“ 날씨한테까지 지지 마.”
은성. 은성은 보호시설에서 만난 한 살 어린 동생이다. 나이는 나보다 한 살 어리지만 적어도 3살은 많은 언니 같은 성격 때문인지 나는 실수로 은성에게 언니라는 말이 튀어나오기도 했다.
은성이의 이마에는 커다란 상처가 있다. 예전에는 앞머리로 상처를 가리고 다녔지만 이제는 일부러 상처를 드러내고 다닌다고 했다. 상처를 이상하게 바라보는 사람은 바로 걸러버리면 된다는 은성의 말에 나는 상처가 있으니까 눈이 갈 수도 있지 않냐고 물었다. 은성은 그냥 보는 것과 멸시하는 눈빛 정도는 이제 경험으로 알 수 있다며 웃었다.
“ 아 그렇단 말이지? 그럼 내 눈빛은 어떤가 봐 봐.”
나는 능글거리는 눈빛으로 은성의 이마 위 깊게 흉 진 상처를 바라보았다.
“ 음.. 그 눈빛은 사랑인데? 아니다. 연민인가. 아니다 언니 나한테 반했어?”
“ 오 들켰어.”
깔깔 웃으면서 은성은 샤이니 키 눈썹 사진을 찾아 나에게 내밀었다.
“ 좋아! 간지 나지. 상처 때문에 눈썹 모양이 이렇대. 난 일부러 멋져 보이려고 민 줄 알았잖아. 마음에 들어 이 눈썹. 언니 난 이렇게 상처 때문에 눈썹 모양이 다른 사람들도 뭔가 더 멋져 보여. 상처도 이렇게 스타일리시하게 보일 수 있는 거잖아.”
나는 은성이의 상처가 이마가 아니라 눈썹 근처였다면 더 나았겠다 생각했다.
보호시설은 우리 같은 아이들에게는 마지막 비빌 언덕이었다. 말 그대로 보호가 가능한 시설. 최소한의 의식주가 해결되는 곳. 몸이 녹아버릴 정도의 달콤한 사랑은 아닐지어도 따뜻한 보리차 같은 온기는 느낄 수 있는 곳. 그래서 버림받았다는, 내쳐졌다는 마음을 어느 정도 희석시킬 수 있는 곳이었다.
나는 배고픔에 늘 예민했다. 기초생활수급자로 하루 한 번 집으로 도시락이 배달됐지만 한참 커 세상의 모든 공기를 흡입할 것처럼 먹던 나에게 작은 플라스틱 도시락 한 개는 더 배고픔을 갈구하게 만드는 이상한 물건이었다. 도시락을 아껴먹다가 흰쌀밥 한쪽에 시큼한 맛이 돌기 시작하면 나는 코를 가까이에 대고 킁킁거리다 간장을 조금 넣어 비벼 먹었다. 간장의 시큼함이 쉬어버린 밥의 시큼함을 완전히 덮어버렸다.
집 근처 슈퍼 사장님은 유통기한이 조금 남아 세일하는 물건들을 내 편에 들려 보내기도 했는데 나는 그렇게 그 커다란 봉지가 부끄러웠다. 왜 검정 봉지가 아니라 흰 봉지에 이 물건들을 가득 담아주는지.. 50%이라는 커다란 숫자가 왜 늘 비닐봉지 바깥쪽에 기울어져 밖에서도 보였는지.. 고마움보다는 부끄러움이 더 컸던 날들이었다.
작은 중소기업 기술팀에서 근무했다는 아빠는( 이 이야기는 엄마에게만 전해 들었다. 아빠가 회사에 출근한 적을 난 본 적이 없었으니까) 회식 후 돌아오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해 크게 다쳤다. 처음에 병원에서 전화를 받았을 때 엄마는 드라마 한 장면처럼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고 나는 엄마에게 달려갔던 기억이 난다. 내가 기억하는 아빠의 강렬했던 이미지는 온몸에 붕대를 감고 병실 침대에 누워있던 그 모습이다.
아빠와의 추억도, 기억도 별로 없다는 게 아빠가 돌아가신 후 다행이라 생각했다. 덕분에 누군가를 잃은 슬픔을 덜 느끼고 덜 힘들었으니까. 병원에서 합병증으로 3주 만에 돌아가신 아빠를 보고 엄마는 가면서도 괴롭게 갔다고 했다.
“ 아빤 사망 보험금 하나 안 들어 놨대?”
집안이 더 기울어질 때마다, 엄마의 관절염이 온몸을 뒤덮어 고통스러워할 때마다 내가 허기질 때마다 아빠가 들지 않은 사망 보험금이 떠올랐고 난 아빠를 원망했다.
능력 없고, 준비성도 없고, 가장으로서 아무런 존재감 없던 ‘無‘라는 존재.
엄마는 처음에는 손가락 마디마디의 류머티즘 관절염으로 고생했지만 결국 폐암으로 입원했다.
엄마가 담배를 피우지도 않는데 왜 폐암이 걸린 거냐고 묻는 내 말에 의사는 옅은 한숨을 쉬며 만성 염증과 면역 억제제 약이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고, 다양한 원인이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