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으로는 수백 번 집을 뛰쳐나갔을 은성. 하지만 결론은 늘 알 수 없는 불안감에 늘 마음을 접었다. 그런 은성이 그날 가출하게 된 것은 사실 너무나도 즉흥적인 선택이었다고 했다. 하지만 세상에 즉흥적인 선택이란 있을 수 없다. 마음으로 되뇐 수백 번의 '만약..'이란 가정들로 인한 결과일 거라 난 생각했다.
체육복 바지 안에 있는 2천 원을 만지작거리다 편의점으로 가 작은 컵라면 한 개를 샀다. 990원 육개장을 살지 1200원 왕뚜껑을 살지를 15분 고민했다고 했다. 은성은 은성은 결국 그날 700원짜리 크기가 더 작은 작은 컵 새우탕면을 사 먹었다. 은성이 해산물을, 특히나 새우를 끔찍하게 싫어하는데도 불구하고 국물까지 다 먹어버린 이유는 그 290원 때문이었다.
작은 라면 한 개로 배를 채우고 동네 근처 천을 하염없이 걸었다. 휴대폰 시간을 보니 아직 10시가 안 된 시간이었다. 주변에 높은 빌딩이 번쩍번쩍 빛나 흡사 놀이동산 같이 보였다. ’ 놀이동산 가고 싶다..‘ 그런 생각들을 하던 중이었을까 은성은 중학교 1학년 때 같은 반이던 시은이의 엄마와 눈이 마주쳤다. 근처 아파트에서 살았을 때는 오며 가며 인사할 일이 잦았던 것 같다. 분리수거를 하던 아줌마와 마주치고 커피를 마시는 아줌마와 마주치고 장을 보던 아줌마와 마주치고.. 이상하게 시은이 엄마와 자주 마주치는 게 은성은 신기했다. 그러다 학교에서 조금 떨어진 빌라건물로 이사를 간 뒤에는 한동안 얼굴을 볼 일이 없었다. 오랜만에 아줌마를 만났지만 시은이 엄마는 여전히 차분하고 우아한 느낌이 들었다. 엄마와 비슷한 나이일까 추측해 보다 자신의 엄마보다 20살은 어려 보이는 것 같은 시은의 엄마에게 괜히 주눅이 들어버렸다. 시은이의 아빠는 덩치가 좋고 신사 같았다. 폭언을 하고 발길질을 자식에게 하지 않을 아빠 같았다. 산책 중인 것 같던 시은이의 아빠 엄마는 은성을 보고 먼저 인사를 했고 은성은 애써 어색함을 감추고 인사를 했지만 아마 우울감과 패배감 가득했던 얼굴을 자식을 키우는 부모가 놓쳤을 리 없을 것이다. 은성 쪽으로 되돌아온 시은이의 엄마는 주머니에서 돈 만 원을 꺼내 은성이에게 내밀었다.
“ 은성아 너무 오랜만이야. 저번에 시은이에게 맛있는 거 사줬다면서? 아줌마가 너무 고마웠는데 말할 기회가 없었거든. 오늘 저기 순대 트럭 왔더라. 한 접시 사서 들어가 동생이랑 먹어. 알았지?”
은성은 시은이에게 맛있는 것을 사준 적이 없었기에 순간 옷매무새를 살폈다. 너무 남루해 보이지는 않는지, 배고픔이 얼굴에 묻어나는 건 아닌지 손으로 볼을 만져보기도 했다. 은성은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고마웠던 어른이 시은이 엄마라고 했다. 그날 밤 근처 공원 화장실 한 칸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변기 위에 앉아 졸면서 시은이의 엄마가 자신의 엄마가 되는 꿈을 꾸고 행복해졌다고 했다. 잠깐의 그 꿈 때문에 마음에 행복이 가득한 경험이 신기하다고 나에게 말해줬다.
집이 아닌 화장실에서 처음 잠을 잔 첫 가출이 은성에게는 오히려 더 편안했다. 새벽 공기가 집보다는 차가웠지만 마음이 불안하지 않았고 맞을까 봐 두렵지 않았다. 학교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우선 집을 나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은성의 머리에 동생이 떠올랐다. 복도를 다시 내려와 걷던 그 밤, 은성은 생각했다.
’혼자 남은 동생에게는 나와 같은 고통을 주지 않겠지. 늘 더 맞았던 건 자신이었으니 아빠가 동생에게는 축구공 마냥 머리를 향해 다리를 빵빵 차대지 않겠지 ' 생각했다.
동생이 괜찮은지 확인하고, 동생에게는 인사를 하고 혹은 동생 손을 잡고 집을 나와야겠다고 생각했다. 동생은 또래 친구들이 학교에 등교하고 한참이 지난 후에도 나오지 않았다. 평소 같으면 8시 55분쯤 까치집 머리를 해서 문을 열고 학교로 갈 은후였다.
-너 학교 안 가? 왜 안 나와? 자전거 보관함 옆으로 와
전화도, 문자도 연결되지 않았다.
은성은 동생의 내장은 발길에 차여 터지고 짓물렀다는 사실을.. 그 끔찍한 사실을 일주일이나 지난 후에야 알았다. 은성은 병원에서 아빠를 향해 알고 있는 모든 욕설을 퍼부었다. 주변에 다른 어른들이 있었기에, 다시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기에 했던 행동들이었다. 아빠는 의사와 간호사가 보내는 경멸의 시선에 말 한마디 못 했다. 그 사람들에게는 어깨를 수그리고 불쌍한 척을 했다. 냄새나고 구겨질 대로 구겨진 옷을 입고 의자에 풀이 죽어 앉아 있는 아빠의 머리통을 야구방망이로 사정없이 갈겨주고 싶었다.
욕을 해도 아빠는 달려들지 않았다. 병원은 그래도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이었기에 은성은 은후를 더 오래 이곳에 두고 싶었다.
“ 은후야 미안해. 누나가 미안해.”
12살 어린 은후가 웃을 때마다 은성은 아빠를 더 죽이고 싶었다고 했다.
은성은 은후의 병원비를 구하기 위해, 방법이 없다는 말만 반복하는 무능력한 아빠를 대신해 이 악물고 이모에게, 고모에게 전화를 걸었다. 매를 맞다 맞다 옆구리 쪽을 손으로 누르며 꼬박 3일을 못 움직이더 엄마는 미안하다는 쪽지 한 장을 남기고 사라져 버리고 은성의 전화도, 병원의 전화도 받지 않았다. 엄마의 상황을 다 보며 자란 은성은 떠난 엄마를 원망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아직 커다란 미성숙한 아이를 두 명이나 방치하고 자기 살길만을 찾아 집을 나선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일지 궁금했다. 엄마에 대한 원망이 들 때마다 은성은 시은이의 엄마가 떠올랐고 억울했다.
왜 이런 집에서 태어나 남들과 다른 시간을 보내고 감내해야 하는지. 그래도 12살 어린아이니까, 이렇게나 심하게 다쳐 병원에 입원했으니까 단 한 명이라도 진심으로 걱정하고 달려와 줄 거라 믿었다. 그런 게 사람 사는 세상이라 생각했다. 낳아준 엄마가 있으니, 자식이 아프면 눈물을 흘리며 달려올 줄 알았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명절에는 얼굴을 봤던 친척들이니 은후의 입원 소식에 놀라기라도 할 줄 알았다. 돌아오는 돈은 10원도 없었고 걱정은커녕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은성은 언젠가 수업 시간에 함께 본 영화 인사이드아웃에서 마음속 세워진 모든 믿음과 사랑, 행복 같은 굳건한 형상들이 생각들이 한꺼번에 무너져버린 것과 비슷한 기분이었다고 설명했다. 사랑을 받아도 가족이 아닌 사람에게, 칭찬을 받아도 늘 남에게, 도움을 받아도 늘 자신과 관련이 없는 타인에게 받는 현실은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은후를 그렇게 만든 그 사람은 경찰 조사를 받으면서도 병원에 술 한 병을 기어코 사 와 먹다 결국 제지를 당해 쫓겨나기 일쑤였고, 늘 병원 소파 한가운데 대자로 누워 자식 버리고 도망간 바람난 년 좀 찾아보라고 소리쳤다. 아빠에게 엄마는 맞아서 도망간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랑 바람난 년이었다.
그 모습이 보기 싫으면 눈을 감았고 그 사람이 자신과 피가 섞인 아빠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을 때 은성은 손톱을 뜯었다. 그가 준 신체 일부를 어떻게든 훼손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볼륨을 아무리 크게 높여도 술에 취한 그의 음성은 선명하게 들렸다. 어떤 울분과 분노가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어떻게 그 큰 소리를 내게 하는 건지 은성은 긴긴밤이 두려웠다. 의식 없던 은후도 긴긴밤이 두려웠을 것이다.
너희들 때문에 뼈 빠지게 일하느라 인생이 다 망가졌다는 아빠의 말을 곱씹으며 은성은 자신이 누리는 것이라곤 몸을 눕힐 좁은 공간과 계절에 맞지 않는 이불이 전부인데. 생각했다. 언젠가 아빠가 던진 그릇에 눈을 맞아 한쪽 눈을 크게 다친 은성 엄마는 병원에 실려 갔었다. 이번에도 119는 은성네 가족을 늘 가던 같은 병원으로 이송했다. 병원의 모든 사람들이 은성이의 가족을 알았다. 그 익숙한 인사와 안부가 은성은 어찌나 그렇게 슬펐는지 119 구급대원도, 병원의사도, 간호사도 자신을 투명 인간처럼 대해주길 바랐다. 이번에도 역시 병원에서는 폭력이 의심된다는 신고를 했다. 이번에도...
진단서와 폭력의 흔적들을 사진으로 묵묵히 남긴 은성이의 엄마는 혼자 이혼을 준비했던 것 같다. 이혼을 마무리하지도 못한 채 집을 나가버렸지만. 아무리 되돌아가 생각해도, 엄마를 원망하고 싶은데 그런 엄마를 원망할 수 없다는 말을 은성은 자주 했다. 엄마의 그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냉정한 선택이 그녀를 살린 것일지 모른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그 선택을 보면서 우리도 더 마음을 굳게 먹었는지 모른다고.
은성은 엄마가 정말 사람답게 살길 바란다고 했다. 조금이라도 맘 편하게 행복하게.
엄마보다 자신이 나이가 어리니 힘듦은 어떻게든 더 잘 극복할 수 있다고 호기롭게 말했다. 그 슬픈 눈을 해가지고는.
은후는 식물인간 상태로 3년을 보냈다. 6학년 졸업식도, 중학교 입학식도 할 수 없는 상황을 슬퍼하는 사람이 단 한 사람, 은성 자신이라는 현실을 생각할 때마다 은성은 당장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그럴 때마다 더 주먹을 꽉 쥐었다.
“ 난 언니가 있어서 다행이야. ”
나보다 키도 크고 맘도 큰 은성이를 언니인 나는 꼭 안아줬다.
살아가면서 나를 안아줄 단 한 명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