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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창한 날이 아니라 다행이다

일 년에 3번 정도 분기별로 대학생들이 봉사활동을 나와 학습 공백을 메워줬다. 대학생들이 보호소에 오면 그들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대학생 오빠를 사랑하게 됐다며 갑자기 뒤늦게 공부에 열심히인 동생도 있었다. 민서는 공부에 공자도 싫어 공놀이도 안 하던 애인데 잘생긴 대학생 오빠에 눈이 돌아 공부를 하는 모습은 정말 경이로웠다. 모르는 문제라며 물어보고, 꼭 같은 대학에 들어갈 거라며 강조했다.

“ 너 입학할 때 저 오빤 졸업이다 요것아.”

은성이가 낄낄거리며 말해도 민서는 확고했다. 그 눈빛은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만큼이나 결연에 차 있는 눈빛이었다. 우리는 민서가 그 표정을 짓고 주먹을 불끈 쥐며 “ **대학 가즈아!” 소리치는 게 얼마나 웃겼는지 모른다.

대학생이라는 이름이 주는 평온함이 있는 것일까. 일하는 학생을 더 자주 봐온 나로서는 공부하는 대학생, 공부하고 일도 하는 대학생의 모습이 신기했다.

그 편안함은 연기가 아니었다. 나름대로 평탄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에만 그 ’평범함‘이 묻어난다.

보호소에서 선임인 나는 동생들보다 대학생 언니 오빠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관심 없는 척했지만 대학은 어떤 곳인지 분위기는 어떤지 누가 물어봐 대답하면 나는 귀를 쫑긋하고 집중했다. 특히 학식 이야기를 할 때는 음식 맛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좋을 것 같았다. 대학생 신분으로 어른까지 된다는 건.

내가 이런 이야기를 성민이에게 하면 성민이는 늘 자신도 대학에 가면 다양한 것들을 해보고 싶다고 했다. 봉사든, 공부든, 뭐든. 성실함이 그 사람의 무기가 된다는 걸 성민이를 보며 난 배웠다. 어려운 환경을 탓하지 않고 늘 묵묵히 자기 일들을 해냈다. 학생들의 일이란 어쩌면 공부 한 가지일지 모르겠지만 성민이의 자신의 일은 공부, 돌봄, 집안일, 파트타임 알바 등 다양했다. 내신이 좋아 수시로 노려볼 대학들이 있다고 말하면서 수능까지 잘 버티고 싶다는 성민이에게 난 왜 바보 같은 질문을 던졌을까.

“ 너 대학 가면 나랑 헤어질 거야?”

“ 왜? 대학이랑 뭔 상관이야?”

“ 당연히 달라지지. 가면 예쁜 애들도 많고, 나 같은 건 생각도 안 날 거 아냐.”

“ 나 같은 거라니. 말이 뭐 그래. 뭐가 달라져. 한성민. 이윤슬. 두 사람은 똑같은데. 이윤슬 너 혹시...... 나 대학 떨어지면 헤어지려고 했어? 와.... 너무하네.”

괜히 서러운 마음에 눈물이 쏟아지려 하다가 성민이의 대답에 한순간 또 마음이 놓여 웃어버렸다.

“ 엄마가 좀 덜 아팠으면 좋겠어. 지금은 그게 다야. 내가 어른이 되면 더 도와줄 수 있는 일이 많겠지만 아직 힘이 없으니까 나한테..”

“ 옆에서 있어 주는 것도 힘이라면 힘이야. 나 봐 아무도 없잖아, 지금.”

“ 왜 없어. 남자 친구 여기 있잖아.”

“ 이구.. 엄마에, 나에 넌 돌볼 사람이 둘이나 있어서 힘들겠다.”

성민이의 머리를 아기처럼 쓰다듬었다.

“ 난 돌보는 게 아니야. 함께 하는 거지.”

이렇게 말하는 성민이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성민이는 그렇게 내가 바라던 대학생이 됐다. 대학생이 돼 학자금대출까지 빛은 더 늘어났지만 그래도 성인으로 한 발짝 가까워졌다는 묵직함 때문인지 예전보다 덜 불안해 보였다. 요양원에 엄마를 보내고 다달이 요양원에 들어가는 돈을 벌기 위해 성민이는 돈을 벌었다. 그리고 바쁜 시간을 쪼개 나를 만났다. 나는 내년엔 무조건 나도 대학생이 될 거라며 성민이를 달달 볶아 모르는 것들을 물어보기도 하고 손을 잡고 동네를 거닐기도 했다.

“윤슬아, 어제 엄마가 나보고 뭐라고 했는지 알아?”

“ 요양원 다녀왔구나? 어제?”

“ 내가 가니까 신나서 또 보네 젊은 양반. 이러더니 내가 가니까 성민아 고마워라고 말했다.”

“ 어머! 알아보신 거야?”

“ 알지 않을까. 그래도 엄마랑 아들로 산 시간이 몇 년인데.”

“ 맞아.... 아무리 병실에 누워서 마르고 얼굴이 달라져버린 엄마에게 나는 냄새는 똑같았어. 난 엄마 냄새를 아직도 기억해.”

“ 엄마가 내 이름 오랜만에 불러줘서 그런지 괜히 더 힘났어. 뭔가 희망이 보이지 않아?”

“ 내 앞에도 멋진 희망이 딱 이렇게 있는데.”

“ 내 앞에도 있네?”

우리는 온 힘을 다해 꼭 안고 서로의 온기를 느꼈다. 정말 이제 남은 시간은 이렇게 따뜻하고 멋진 희망이 가득할 것 같았다. 지금 이 순간이 너무 행복해 눈물이 날 것 같다고 하니까 성민이는 자긴 이미 울고 있다고 얼굴을 보여줬다. 진짜 행복해서 울고 있는 성민을 보고 우리는 울다가 웃다가 다시 웃다가 울다가 했다.

은성이 나보다 먼저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은성은 합격소식을 받은 날 병원에 가 은후에게 처음으로 소식을 전했다.

“ 은후야, 힘내. 누나 진짜 힘낼 거야. 은후도 포기하지 말고 힘내줘 알았지?”

병실에 누워있는 은후의 대답 없는 따뜻한 손은 은성이에게 얼마나 잔인한가. 하지만 아직 그 자리에서 버티고 있는 은후를 위해 은성이는 간호조무사라는 새로운 꿈을 좇아 더 힘을 내는 걸지 모른다.

무너지긴 했지만, 완전히 부서진 건 아니니까 다시 이어 붙이면 된다고 어른스럽게 말하던 은성의 얼굴을 은후도 분명 봤을 것이다. 딱지 위에는 언제나 새살이 돋아났으니까.

은성이에게 연락이 온 날 우리는 작은 아기 옷을 사 들고 유리네 집으로 가기로 했다.

보호소에서 몇몇 친구들은 퇴소했다. 유리는 임대아파트로 들어간 지 7개월이 되어간다. 양육모 지원시설에서 한동안 양육 교육을 받고 자립 훈련을 받은 유리에게서는 정말 성숙한 성숙미가 느껴졌다. 미혼모 시설에서 운영하는 자립관으로 연계 도움을 받아 아파트에서 생활할 수 있는 게 엄청난 행운이라고 유리가 말했다. 유리는 그 보호소가, 그 안에 있던 언니들이 자기의 인생을 지켜준 엄마라고 말했다.

징그럽게 “ 울 아기 여기 할머니들 왔어요~”라고 말하면 우리는 미쳤다고 얼굴을 가렸다.

“ 우리 보고 할머니래... 미쳤어.”

“ 왜 내 엄마니까 우리 공주한테 할머니가 맞지.”

작은 손으로 유리는 야무지게 기저귀를 갈고 이유식을 해 먹였다. 집안 여기저기를 총총거리며 아이를 위해 바쁘게 움직이는 유리를 보면서 우리는 뭉클했다.

“ 언니, 조무사 준비 잘 돼? 나도 나중에 공부 다시 해야지.”

“ 그럼,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공부하면 되지! 지금은 여기 요기 이 꼬맹이 먼저 잘 키워보자!”

“ 너무 예뻐 언니. 진짜 이름 같이 크면 좋겠어.”

은성이는 유리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 유리야, 아무리 윤슬언니가 좋아도 그렇지 어떻게 애 이름을 윤슬로 그대로 만들었대?”

“ 윤슬언니 이름 듣자마자 나 너무 좋아서 심장이 뛰었어. 처음 안 단어거든. 윤. 슬. 난 울 공주가 거대한 파도 같이 자라는 건 바라지도 않아! 나는 잔잔하게 반짝이면서 컸으면 좋겠어. 잔잔한 행복 끝없이 누리면서.. 이름처럼.”

이윤슬. 햇빛이나 달빛에 비치어 반짝이는 잔물결을 떠올리며 엄마도 내 이름을 짓지 않았을까. 그래서 내가 지금 이렇게 잔잔하게 반짝이며 커나가고 있는 것일까. 오랜만에 엄마가 보고 싶었다.

이제 어느 순간부터 스스로가 불쌍하다고 느끼지 않는다. 아니, 그렇게 느껴질 겨를이 없다. 공부를 하고, 일을 하고, 사랑을 한다. 보호소를 나와 작은 원룸에서 혼자 살게 된 지 두 달이 지났다. 검정고시에 합격했고 그날 성민이와 파티를 했다. 성민이는 합격소식을 전한 날 나에게 시계를 선물해 줬다. 하루 24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1초 1분 느끼며 함께하자고 했다. 미용학원 등록을 하고 나의 '일'을 멋지게 해내는 어른이 되기 위해 그냥 열심히, 성민이가 말한 것처럼 묵묵히 지내는 것이 정답이란 걸 이제 알 것 같다.

언젠가 나의 일터에 은성이 어머님이 오시면 갸녀린 얼굴이 환해 보이게 머리를 바꿔주고, 언젠가 하늘에서 엄마를 만난다면 엄마에게 잘 어울릴 것 같은 머리 색으로 염색해 줄 것이다. 성민이의 어머님 머리도 멋지게 커트해 줄 것이다.

화창한 날이 아니라 다행이다. 결국 해는 우리를 향해 비칠 것이고, 흐렸던 날 덕분에 해가 비치는 그날이 더 행복하고 값지게 느껴질 것이다.

살아있는 이상, 나에게도 언젠가는 화창한 날이 온다. 이게 내가 알게 된 삶의 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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