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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문제들

“ 고마워. 윤슬아. 그래도 너 때문에 한 번은 웃게 돼.”

이- 히 – 하며 입꼬리를 손으로 잡고 위로 올려 웃긴 표정을 지었다.

“ 어! 오늘은 두 번 웃은 거지? 아싸. 내가 한 달 뒤에 다시 고백 안 했음 어쩔 뻔했어? 성민이 넌 정말 행운을 잡은 남자라고! 잊지 마!”

“ 한 달 뒤에 고백 안 했음... 내가 하려고 했지! 좋아해 많이. 고마워 정말. 그리고 그날 네가 죽으려고 했다던 그날 죽지 않고 지금처럼 살아줘서 고마워. 네가 살아서 지금 만날 수 있었잖아 우리 둘이.”

온몸을 긁으며 울부짖던 날 나는 차들이 쌩쌩 지나가는 다리 위에 서서 아래 검게 흐르는 강물을 바라봤다. 떨어질까.

아파트 옥상에 올라가 점점이 작게 보이는 것들을 내려다봤다. 떨어질까.

커다란 버스가 올 때마다 바라봤다. 떨어질까.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항상 엄마의 웃는 얼굴이 떠올랐다. 나한테 사랑한다고 말하던 엄마의 목소리와 냄새가 떠올랐다. 나를 안아주고 뽀뽀해 주던 엄마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래서 난 살아있었다.

17살의 내 멈춘 시간을 듣고 성민이는 내 잘못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런 일로 죽기에 넌 너무 소중한 존재라고 말했다. 그때였을까. 멈춰있던 내 17살이 조금씩 움직이게 시작한 게..


성민이와 내 삶의 화두에서 완전히 노선 밖이던 다른 주제, '사랑' 속에서 우린 다시 힘을 내고 슬픔을 행복 쪽으로 조금씩 밀어갔다. 다양한 문제들로 힘들었지만 그러한 문제들을 밀어내며 우리는 나아갔다.

생각보다 그 마음의 힘이, 사랑의 힘은 컸으니까. 우리는 견딜 수 있었다.

교복을 입지 않는다고 내가 19살인 것이 달라지지 않는다. 사회에 나가기 위한 준비를 위해 검정고시 공부나, 자격증을 위한 공부를 할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자립할 수 있는 '힘'이었고 그 힘을 기르기 위해 나는 어디서든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기 위해 애쓸 수밖에 없었다.

적성이 뭔지, 하고 싶은 일이 뭔지 고민하는 시간은 사치였다. 이곳을 나가게 되면 경제적으로 자립하며 정말 어른 노릇을 해야 한다.

지금의 울타리를 벗어나면 다시 먹고 /자고 / 입는 그런 일차원적인 고민을 해야 할 것이다. 나는 보호소라는 단어가 입에 붙어 '보호소 언니', '보호소 엄마' 같이 말하지만 그럴 때마다 복지시설이 낫지 않아? 하고 직원분들은 말했다. 보호보다는 복지가 넓은 단어라고 했지만 내 기준엔 뭐가 더 나은지 알 수 없었다.

나에겐 '행복'한 삶, '행복'한 환경이라는 복지라는 단어가 모호하고 추상적인 단어였으니까.


사회 취약계층을 보호해 주는 다양한 정책이 있다고는 하지만 내 주변에 정작 그런 혜택을 받은 이는 거의 없다. 이곳에 들어온 친구들만 봐도 그렇다. 학생들을 위한 심리 상담 프로그램이나, 지원센터는 접근하기까지 용기가 필요하고 보복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늘 문 앞에서 몸이 더 움츠러들었다. 하민이는 학교폭력으로 상담을 요청했지만 현실적인 도움을 받지 못했다. 상담이라는 이름 아래 삼자대면이라는 이상한 틀에 껴 맞춰 피해자와 가해자가 서로 마주하던 상담을 이야기할 때마다 분개했다.

가해자는 강제 전학을 받았지만 학교에 남은 하민이 뒤에는 학폭 피해자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당한 아이, 맞은 아이, 학폭 피해자라는 수군거림이 하민이는 가장 힘들었다고 했다. 손을 내밀어도 불쌍해서 다가온다는 마음이 들어 먼저 멀리했고, 대놓고 무시하는 친구들에게는 상처를 받았다. 때린 아이는 한 명인데 전교생이 하민이를 공격하는 기분이 드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강제 전학이 하민이와 그 아이의 인연을 완전히 끊어놓지도 못했다. 하교할 때마다, 오토바이 소리가 크게 들릴 때마다 하민이는 긴장하며 몸을 떨었다.

반복적으로 상처가 나던 목뒤가 찌릿한 것 같기도 했다. 하민이는 결국 마음이 무너져 내릴 것 같아 담임 선생님에게 너무 힘들어 머리가 어떻게 될 것 같다고 도움을 요청했다. 선생님은 부모님과 한 번 다시 만나 이야기를 해보자고 했지만 이미 날 이해하고 보듬어줄 부모는 부재했다. 일을 키워 동네에 이름이 다 퍼졌다고 소리를 지르던 아빠와 왜 강인하지 못하냐고 혼내던 엄마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선생님의 따뜻한 말과 위로가 하민이의 마음을 완벽하게 매만질 수도 없을 터였다. 결국 혼자 어느 정도 감내해야 할 부분이었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교내, 시에서 하는 심리지원센터와 연계해 하민이는 12번 정도의 상담을 받았고 그때마다 두렵고 때론 이가 갈릴 정도로 화나던 장면을 반복적으로 떠올리며 떠나보내기를 연습해야 했다. 하민이는 필요한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무리 상담을 받아도 평생 그 기억을 떠나보내지는 못할 것 같다는 말을 덧붙였다.

반복되는 폭력이나 가족과의 갈등으로 인해 자발적으로 집을 뛰쳐나와 거리를 헤매다 온 친구들도 있다.

세상은 창문틈으로 들어오는 얇은 햇빛 한 줄기와 방안 가득 채운 어둠이 아닐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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