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크빛 회복연습

남편의 부재 속 나를 구조한 작은 선택

by 지오쌤

가을 기운이 서서히 스며드는 어느 날 집 안은 한 여름 내내 쏟아부은 태양의 열기가

빠지지 않아 오히려 바깥공기가 더 시원하게 느껴졌다.

그날은 금요일 오랜만에 '도시의 고향' 가락동에 다녀왔다.

아이들을 키우며 살았던 기억이 층층이 쌓인 그곳.

마음을 추스르듯 무채색이 아닌 옷을 입고 외출해 보기로 했다.

12자 장롱문을 열어 모조리 살펴보았지만 이 계절에 입을 옷은 온통 무채색뿐이었다.

며칠 전에 읽은 사이토 히토리의 책 한 문장이 떠올랐다.

"운을 좋게 하려면 밝은 색 옷을 입으세요."

느닷없이 핑크색 옷을 떠올렸다. 핑크색옷은 없었다.

사 본적 없는 색깔의 옷이 있을 리 없었다.


아이들이 옷방으로 쓰는 베란다로 나가봤다.

그곳은 어느새 옷과 가방으로 점령된 창고가 되어 있었다.

결혼한 큰딸이 두고 간 옷, 사두고 잊은 옷, 유행이 지난 옷들.

가득 쌓인 물건들. 분명 예뻐서 사 왔을 텐데 전혀 아름답지 않았다.

절약이라며 버리지 않은 것들.

내가 삶을 방관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검약이라 믿었지만 실은 '지나침'이었다.

사두지 말았어야 할 것도, 버리지 못한 것도.

그 와중에 나는 핑크색 옷을 찾고 있었다.


그날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쇼핑몰 좌판에 러블리한 블라우스가 눈에 들어왔다.

가격은 5천 원.

딸 하나, 나 하나두 장을 샀다.

말쑥하진 않았지만 마음이 환해졌다.

오래 붙잡고 있던 무채색 감정에서 조금 빠져나온 기분이었다.

"이런 게 횡재지." 속으로 중얼거렸다.


사실 그날은 평범한 금요일이었지만 감당하기 힘든 감정이 밀려오던 날이었다.

남편이 주식을 하는 건 알았지만 큰 금액의 신용으로 주식을 했다는 사실.

그리고 2~3천만 원에 달하는 손실.

나는 어떤 대책도 없이 그 현실 앞에 혼자 서 있었다.

한 때는 그만큼 벌기도 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건강이 악화되는 상황에서도 붙잡고 있었던 모양이다.


남편의 주식계좌를 정리하려면 먼저 신용대금을 모두 갚아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내게 그만한 돈이 없었다.
사정을 솔직히 이야기 했다.

남편 계좌의 모든 주식을 처분한 뒤

증권사에 신용대금을 회수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 후 1주일 가까이 지옥 같은 시간을 보냈다.


바로 그날 쇼핑몰 좌판에서 핑크색 블라우스를 골랐다.

조심스러운 작은 회복의 징후였는지 모르겠다.

지나침은 줄이고, 필요한 만큼은 허용하며 나를 돌보는 연습이었을까?

핑크빛으로 소심하게, 자기 연민을 걷고 자조도 내려놓고

나를 위한 작은 선택을 하나 하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그러나 분명히.


그날 무기력과 분노, 자책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남편이 날린 수 천만 원, 내 손안에 남은 건 달랑 300만 원뿐이었다.
그 돈을 들고 쇼핑몰 입구를 지날 때, 나는 속으로 말했다.

"괜찮아 살아보자. 그리고 오늘만은 예쁘게 살아보자."

그렇게 고른 블라우스 두장.

남들이 알면 속없다 하겠지만 나는 나를 구조한 셈이었다.

블라우스 두장으로.



이제 남편과의 사별이야기를 여기서 덮으려 합니다.

그 블라우스를 지금은 입지 않지만 그날 입었던 내 '마음'은 잊지 못합니다.

그 마음을 기억하고 싶어서 이 글을 썼습니다.

그리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남편과의 기억은 사랑이었고, 고통이었으며,

내 삶의 커다란 한 챕터였습니다.

이제 그 장을 덮고 다음 페이지를 넘기려 합니다.

다시 나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