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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일상 산문

YTN 퇴사

무모한 도전? 무한한 도전? 무작정 독일로 떠나다

by 정병진


대학생 때 대학로에서 연극배우로 활동했어요. 당시 독일에 초청돼 두 차례 공연을 했지요. 공연 외의 독일 관광 모습입니다.

싸이월드 문 닫기 전에 백업들 하고 계신가요. 일괄 다운로드 프로그램을 돌리는 중인데 도저히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사진들을 두서 없이 다운 받다보니 대학생 때 독일 다녀왔던 사진첩에서 오래 머물고 있네요. 오글거리는 사진들 보다가 손발이 파괴될 지경입니다.


그땐 여행지였던 독일로, 이제 저희 네 식구가 함께 떠납니다. 출국까지 한 달이 채 안 남았습니다. 인생을 긴 호흡으로 내다봤을 때 독일이 기항지가 될지 정착지가 될지 지금으로선 예단하기 어렵습니다. 하고 싶었던 공부를 깊이 하고 싶고, 독일이나 프랑스 등 유럽에서 일하며 새로 기반을 닦으려 합니다.




익숙한 곳을 떠난다


YTN은 이달 말 퇴사합니다. 그간 능력에 비해 과분한 기회를 많이 누렸습니다. <쏙쏙경제>부터 <뉴스21>, <뉴스나이트>까지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값진 경험이었습니다. 탄핵특보나, 각종 선거방송, 남북정상회담 프레스센터 중계 등은 역사의 현장에서 제가 뭘 해야 하는지 깊이 성찰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인생의 변곡점에 설 때마다 저는 노래를 통해 용기를 얻곤 했습니다. 독일행을 앞두고 한국에서의 삶을 정리하는 요즘은 박정현 님의 '미아'를 무한 반복 중입니다. <비긴어게인>에 출연한 그녀가 이탈리아의 멋스러운 해변가에서 부른 버전을 듣습니다.


또 다시 그 길을 만났어
한참을 걸어도 걸어도
익숙한 거리 추억투성이
미로 위의 내 산책


사실 한국에서의 시간을 정리한다고는 하는데, 제대로 하고 있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익숙한, 추억 투성인 고국을 뒤로하고 기억이 별로 없는 타지로 벗어나려는 마음은 그저 조심스럽기만 합니다. 저와 제 가족이 스스로 길을 잃어버려 일부러 미아가 되려 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길을 잃어야 진짜 여행이 시작된다"는 누군가의 말에 용기를 냅니다.


재수했을 때, 대학에 들어가 아나운서가 되기까지. 앵커로, 온라인 매체 편집장으로 걸어온 길은 하나 같이 '미아'의 노래 가사처럼 '돌고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쉬운 길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길을 잃어버린 나 가도가도 끝없는
날 부르는 목소리
날 향해 뛰던 너의 모습이 살아오는 듯
돌아가야 하는 나
쉬운 길은 없어서
돌고 돌아가는 길 그 추억 다 피해
이제 도착한 듯해
이젠


그래도 저를 남편으로 불러주는 아내와 아빠로 부르는 아이들이 함께 떠나는 길이기에 이 쉽지 않은 여행을 다시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독일에 연고는커녕 확실한 게 아무것도 없지만, 함께 손을 맞잡은 가족의 온기 만큼은 가장 확실한 나침반입니다.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성경 속 요한복음 5장 7절 말씀입니다. 언제부터인가 몸과 영혼이 심약해진 저는 환경과 타인의 허물을 탓하며 자신이 만든 울타리 속에 점차 매몰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일어나 걸으라"는 이 메시지에 자리를 툭 털고 일어나게 됐습니다. 한국을 떠나는 시점에 제 결심을 받쳐주는 든든한 말씀입니다.




관심이 필요한 누군가를 위해


제 과거 사진들을 보면 느껴지시겠죠. 저도 사실 관심 받길 좋아하는 기질이 다분한 '관종'입니다. 결혼을 하고 앵커로서 점잖게 살고자 노력해왔지만 그간 누르며 지냈던 성정이 어디가지 않습니다. 그래도 이제는 그 관종끼를 다듬어 제가 관심받기 보단 '타인에게 관심주는' 삶을 살고자 합니다. 그런 공부, 그런 일을 꿈꿉니다. 글과 영상으로 소식 나누며 그 꿈을 어떻게 그려나가는지 차차 공유하고 싶습니다.


"너무 충격이다. 나 기자 생활 하면서 '꿈'을 이야기하는 사람, 형이 처음인 것 같아"


얼마 전 만난 예전 직장 동기 녀석이 제게 건넨 말입니다. 꿈을 꾸되, 발을 딛은 현실 또한 명확히 인지하며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겠습니다. 늘 쉬운 길은 없었고, 이번에도 어렵겠지만, 그래도 이렇게 또 한 번 두 눈을 질끈 감습니다. 기존 경로를 이탈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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